임헌영 세상읽기-왜들 이렇게 한이 많을까

입력 2001-10-23 15:19:00

곱던 단풍도 한 철이다. 지역과 계곡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새 그 아름답던 자태가 노추(老醜)로 변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아니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어이 저렇게 지고 마는 것을. 권력도, 재력(財力)도, 천재도, 미모도, 사랑도 다 철이 지나면 기울건만 왜 사람들은 가을이 와도 자신은 마냥 봄인 줄 알고, 단풍이 들었건만 여전히 여름인 줄 착각하며, 드디어 낙엽이 우수수 지는데도 자신의 몸이 잘 익은 열매라도 달고있는 듯이 뻐기고, 종내엔 앙상한 가지만으로 오스스 떨게 될 나목(裸木)의 처지에서도 나라를 구할 동량(棟樑)인 양 환각에 빠져있을까.

잘난 사람일수록 환각증세는 더욱 심한데다 고치기조차 어렵다. 환각증적 수재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어지럽기 마련이다. 바로 요즘 우리나라 처지다. 모두 너무 잘났다. 탁월한 능력을 못다 펼쳤으니 한 또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한풀이나 받고 살아야 하는 못난 사람들 역시 "왜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살아야 하냐"고 한이 깊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뀌면 좀 달라지려니 싶었는데도 이런 사회풍조는 여전하다.

그래설까. 여전히 단풍놀이 행락은 저 유명한 부여(夫餘) 시절의 영고(迎鼓)처럼 "며칠을 계속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를 즐기"곤 한다. 그냥 마시고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광란의 단계에 육박하는 이 풍조는 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일년 내내 영고와 제천(祭天)의 가무 음주가 방방곡곡을 울려대는 대축제의 르네상스를 맞고있는 격이다. 바로 노래방 이야기다. 골목의 각종 노래방부터 달리는 버스에 이르기까지, 가족모임부터 공식적인 모든 행사 어디서나 '노래방' 장치에 의한 광란이 한반도의 허리 아랫부분을 요란하게 뒤틀고 있다.

잠깐 노래가 그치기만 하면 금새 칼날 퍼런 원한들이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상대의 목이라도 자를 듯이 기세를 올린다. 이러니 셋 이상 모이면 대화와 토론의 풍조보다는 차라리 노래로 기분 내는 게 백 번 낫겠구나 싶기도 하다.

노래방이 없었다면 국민 정신건강이 어떻게 됐을까 염려되다가도 지금이 어느 땐데 우리가 여름 배짱이처럼 즐기기만 해도 될까 싶어진다. 하기사 노래방 말고 딱히 보통사람들이 할 일이 뭐 있을까. 외쳐봐야 높은 데서는 들어주지도 않고, 답답해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집단행동을 하면 온갖 구실과 죄명을 붙여 공권력이 동원되는 판세 아닌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돌아보면 제대로 돌아가는 걸 찾기 어렵다. 정치판은 너무 한심해서, 여당을 보면 저러고도 어떻게 집권했을까 싶다가 야당을 쳐다보면 그러니까 여당이 존재할 빌미를 주는구나 싶어진다. 그 여당에 그 야당이다. 서로 욕하면서도 이제는 아예 닮아버려 단짝이 된 것 같다. 일전 불사 용전하는 모습이 가히 전쟁을 능가한다. 어느 풍자작가도 우리나라 오늘의 정치판도처럼 생뚱한 웃음거리를 제공해 주진 못할 것이다. 한 발 물러나 객석에서 관람하노라면 너무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무슨 일이 터지면 분석, 판단, 처리할 생각보다 일단 방어하기 바쁜 관계당국과 여당이나, 그걸 뻥튀기하기 바쁜 야당이나 국민들에게 짜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째서 '혐의'만으로 관계기관은 조사(내사) 대상이 아닌가. 명확한 증거를 갖다 대라니, 그럼 관계기관은 앉아서 갖다주는 증거만 확인하는 기관일까. 차라리 '혐의'가 발생하면 그런 사소한 사건은 관계기관에 맡기고, 정치는 정치가 할 고유의 일을 하면 되는데 관계기관이나 정치가 자기 할 일은 두고 다른 일에 매달려 있으니 국민들도 그저 타는 가슴 달래며 노래나 부를 수밖에 달리 어찌 한풀이를 하겠는가. 어째서 '혐의'를 조사해야할 관계기관이 국회의 '면책 특권'에 대하여 일갈하며, 이런 말이 나오면 부끄러워해야할 분들은 더욱 기승을 부릴까. 위한다는 게 도리어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원칙을 벗어나선 안된다.

무슨 일이나 어려울 때는 원칙으로 돌아가는 간단한 방법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보통 사람의 두뇌면 쉽게 풀어낼 쟁점인데도 잘난 사람들이 싸움질만 하는 것은 문제 해결보다는 차라리 분탕질을 즐기자는 것밖에 안되니 결국 노래방만 불경기가 없게 되는건가.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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