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풍토 쇄신 참 인간 형성16세기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학자, 사상가로서 퇴계가 세상을 어떻게 보았고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기로 하였으며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어떠한 기대와 희망을 가졌던가.
사대부로서의 퇴계의 기본입장은 민생문제를 보는 시각에서 잘 드러난다. 이념의 바탕 위에서 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현명한 지성과 아울러 일념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다. 또 주체적 외교나 병적(兵籍) 조사와 민생의 실태에 관한 견해 등 퇴계의 여러 주장이 당시 임금과 정부에 의해 하나하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선생의 참다운 충정과 심각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그의 고언(苦言)은 길이 후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다음으로 퇴계의 환산(還山)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에 주목해야 한다. 퇴계는 사대부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면서도 매양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고 결국 산림(山林)으로 돌아온다. 이 부분은 무엇보다 선생의 당시 시대관과 그 시대에 대해서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아야 한다.
퇴계의 시대, 즉 16세기 초·중엽은 우리나라 정치사·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시대다. 45세 때 을사사화를 몸소 겪은 선생이 이 시대를 '말세'로 보았고, 동시에 이 말세적 현상을 극복하고 새 세운(世運)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사림파로서의 퇴계선생의 신념이었다. 중앙에 있어서의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퇴화와 지방에 있어서의 신진사림파 철학의 대두,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며 퇴계의 역사적 위치가 설정될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여기에서 자기 사명을 알았다. 말세를 극복하고 조국을 이상국화시키려던 선생의 문명 지향적 의욕은, 정신풍토의 시정이라는 근본적 방책에 착수케 됐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림파 철학-성리학의 올바른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퇴계선생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을 통한 참다운 인간 형성의 학문이었다. 선생이 지방에서 전력을 다해 서원 창설운동을 벌이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치에 무관심한 듯이 보였던 퇴계가 이상하리만큼 서원 창설운동에 사회적·문화적 관심을 집중시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서원 교육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사림정치는 퇴계선생의 이러한 교육운동에 의해 배출된 인재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관직을 버리고 지방 향리로 물러난 것을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는 소극적 인생관으로 평가하는 잘못된 인식과는 달리, 사림파 철학의 완성에 의한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지양, 새로운 교육운동에 의한 정치 에너지의 개발 등으로 새 세운을 맞이하려는 그의 적극적 가치 창조의 생애를 우리는 사려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16세기 당시의 사회풍토는 어둡고 부조리한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가 임금의 형식적 예우와 정부 관료들의 역량으로 보아 이러한 기성 세력들과 정치를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퇴계는 지방에 내려와 새로운 인재 육성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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