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심층면접-철학과 과학

입력 2001-10-04 14:23:00

사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존재 일반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이란, 특수한 것에 대한 지식이다. 그것은 명백히 지시된 대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존재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다. 과학으로 얻는 지식은, 과학이 존재 자체에 대해 철학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과학의 지식은 삶의 목표와 가치 또는 그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학문은 과학의 명증성 바깥에 있기 때문에, 삶의 본질적 의미를 과학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이란 과학적 논증을 초월하여 실존한다. 즉, 인간의 삶과 행위는 과학적 논증을 초월하는 진리와 설득력에 근거하는 것이다.

과학은 철학과 연결되면서 빚어지는 혼란에서 스스로를 지킨다. 과학은 사변적(思辨的)인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학은 철학에 특유의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학은 과학 자체의 한계성을 인정할 수 있다. 과학만으로는 진리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은 철학의 자체적 탐구 영역이 커지는 것을 내버려둔다. 과학은 철학적 발견의 가치를 승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과학적인 연구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철학이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과학은 철학에 간섭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과학은, 철학이 근거 없는 진술이나 상상에 의한 증명을 내놓지 않도록 면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는 과학과 철학, 양면에 이익을 준다.

과학은 철학적 방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이 그대로 과학에 적용된다거나 과학이 철학의 고유한 목적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과학이 추구하는 참된 의미의 동기가 될 때 효력을 발휘한다. 철학은 과학에 이념을 제공한다. 과학자는 그 이념에서 통찰력을 얻고 앎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성찰하며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철학은 과학에 침투해 들어온다. 철학은 과학의 방법에 접근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철학이 침투한 과학은, 말하자면 구체화된 철학이다. 과학은 과학의 활동에 내포된 의미를 인식하면서 사실상 의식적으로 철학화 한다. 과학자들이 철학에서 얻는 이익은 실용적인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점차 과학의 전체적인 전후 관계를 알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은 과학적 연구에 대해 새롭게 강한 동기를 얻게 되며, 그들의 과학적 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한편으로, 철학은 과학이 철학에서 필수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비록 철학과 과학과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진정한 철학은 과학에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철학은 과학으로 터득할 수 있는 세계의 실체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철학은 진실하고 설득력 있는 것은 무엇이나 알고자 한다. 철학은 스스로 증대하는 자아 인식의 결실을 맺기 위해 진실하고 설득력 있는 것을 원한다. 철학하는 사람은 누구나 과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경험을 얻는 것이다.

-칼 야스퍼스, '대학의 이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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