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마을을 찾아서-봉화 바래미 마을

입력 2001-09-20 14:07:00

◈영남 유림단 독립운동의 산실

태백산 줄기 응방산(매봉산)을 배경으로 아늑한 구릉처럼 안은 산을 뒤로하고 앞으로 내성천과 평야를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봉화읍 바래미(해저1리)마을.

바래미는 신라시대 파라미(波羅尾)라고 불리다 마을이 바다(海) 밑(底) 보다 낮다하여 해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래 의령여씨의 오랜 세거지였으나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김씨 팔오헌(八吾軒) 김성구(1641~1707) 선생이 건너마을 용담에서 이곳으로 옮겨 입향조가 된 이후 마을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후손이 입향조의 뜻을 받들어 1746년 학록서당을 창건하는 등 후학 배양에 힘쓴 결과, 문과 19장과 진사과 70여장, 기타 음직 참봉 등 다수의 관직이 배출됐다. 팔오헌공 11대 종손인 김호충(75)씨는 "이같은 연유 때문에 '바래미는 일산대(과거에 급제하면 그 상징으로 마을 어귀에 세웠던 솟대) 그늘에 우캐(가을걷이를 하여 찧기 위해서 말리는 벼)를 못말린다'말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을"이라고 전해주었다.

이같은 명성에 걸맞게 이 마을에는 우리나라 문중에서는 드문 사례인 3종가가 모여 있다. 팔오헌공의 아랫종가와 팔오헌공의 고조부이자 윗종가인 개암(김우굉) 선생의 사당은 원래 상주 응동에 있었던 후손들이 이곳에 모셨다. 팔오헌공의 형인 학정공 김추길 선생은 중간종가다. 윗종가와 아랫종가는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것도 문중의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오랜 전통의 선비마을 답게 유서깊은 고택들이 잘 보존돼 있다. 조선말기 문신인 만회 김건수(1790~1854)가 살던 만회고택(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69호)은 3.1운동 직후 유림들이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곳이다. 또 1925년 유림단 독립운동 자금 모집시에도 영남 북부지방 유림들이 이곳에 모여 논의를 했다.

당시 이 마을 출신 김건영 김창우 김창백 김한식 김뢰식 김창근 김홍기 김창희씨 등 다수가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는 등 자연부락 단위로 가장 많은 12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훈장과 표창을 받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성지 중 한 곳이다.

특히 남호 김뢰식(1877∼1935)은 경상도의 명망높은 부호로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시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대부를 받아 제공한 일로 유명하다. 그가 살던 집이 남호구택(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8호)이다.

이밖에도 해관 김건영(1848∼1924)선생의 가옥(경북도지정 기념물 제117호)은 1919년 파리 장서운동을 전개할 때 지역 유림들의 연명장소로 이용됐던 곳이다. 해와고택(경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38호), 개암종택(경북도지정 기념물 제137호) 등 많은 고가들이 이 마을의 전통을 웅변하듯 고스란히 남아 있다.

봉화.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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