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마을을 찾아서-청송 덕천마을

입력 2001-08-30 15:25:00

◈조선시대 정승 13명 배출

덕천마을은 동쪽으로 '가풀재'를 사이하여 청송읍 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파천면 지경리, 남쪽으로는 신흥리, 북쪽은 중평리, 관리와 접해있다.가풀재(갚을재)는 이 마을 장(蔣)씨가 재를 넘다가 도적을 만나 변을 당하니 그 후손이 원수를 갚았다 하여 붙여진 재미난 유례가 전해진다.이 마을은 하덕천과 상덕천, 이사리, 고이사리 등 4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졌다. 하덕천은 고려 문거 심원부의 현손 거묵덕(居默德)이 개척했고 상덕천은 조선인조 병인년에 의성에서 장(蔣)씨 모자가 들어와 그후손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사리는 달성인 서윤이 마을을 열었다.

이 마을 총 134가구중 청송(靑松)심씨 67호, 달성(達城)서씨 30호, 아산(我山)장씨 10호가 있어 지역민들은 그중 최고 거문을 앞세워 청송심씨집성촌이라 한다. 이곳 청송심씨는 조선시대 500년 간 정승 열셋과 왕비와 부마 각각 넷씩을 배출한 우리나라 대표적 명가로 이성계의 역성혁명때 고려 망국의 한에 관직을버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외곬 충신 악은(岳隱)공 심원부(沈元符)의 후계다.생활문화는 개방적으로 많이 변모 했지만 아직도 옛날 양반기질이 그대로 남아 만나는 사람들과는 한결 같이 예도(禮道)를 갖추고 고풍을 중시한다. 충경(忠敬)은 이곳 향약으로 주민들이 화합하고 아우르는 전통의 근간이 됐다.

마을입구에 들어선 경의재(景義齋)는 이마을의 상징으로 청송심씨 향파의 시조인 원부 선생의 향단을 모시고자 후손들이 지난 1983년에 건립한것이다.선생은 정몽주, 길재와 함께 대표적인 고려말 충신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보여 후손들이 이를 받들어 국가와 고장이 어려움에 처할때 선비로서 기상을 지키며 목숨을 바치는 충의의 기백을 면면히 이어가며 살았다.

매년 음력 3월 25일 제향을 되고 여름방학에는 전국의 후손들을 모아 전통예절교육을 실시하는데 올해로 18회째가 된다. 24세 종손인 심영섭(66)씨는 "관향의 내력과 조상의 뿌리, 전통예절을 가르쳐 가문의 긍지와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 준다"고 했다.앞으로 이곳 경의재 수련원은 경북북부유교문화권 개발사업에 포함돼 전국 청소년들의 전통예절 교육장으로 활용될 계획으로 유가적 가치관 정립과 정신문화 함양에 기여 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을에는 조선후기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을 떨쳤던, 9대 2만석군 심부자집 아흔아홉칸 구가 송소고택(도지정 민속자료 63호)이아주 유명하다. 고려때 위위사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의 후손 심상악이 1883년에 지경리 호박골에 지었다가 현지로 옮겨 온것이다.

심부자가 은화로 세금을 내라는 나라의 지시에 의성 안계의 전답을 화폐로 모두 바꾸자 안계고을의 것이 다모여 청송 호박골로 옮기는 행렬이 10리에 뻗쳤고 그날밤 도적떼가 들자 내당마님이 순히 고방을 열어 요구대로 돈과 재물을 내주고 남은 것으로 이 집을 지었다는 유례가 있다.

집 전체 평면은 'ㅁ'자형의 99칸. 집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면 하나는 대문을 중심으로 큰 사랑채와 대문 우측에서 작은 사랑채구역, 그리고사랑채를 뒤로한 안채이다. 이런 배열은 산림공간과 휴식공간, 작업 및 생산공간을 둔 것이며 생활 구분을 뚜렷이 한 전통 반가의 건축양식이다.

1896년 병신년에 청송의병대장으로 당시 감은(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전투에서 왜병을 격멸한 심성지선생의 강도소인 소류정도 마을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청송.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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