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후반 해방공간의 대구에서 청마 유치환은 '죽순'동인 활동을 하면서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다. 청마는 당시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살면서 경북대 문리대에 출강, 시론을 강의했다. 당시 통영여중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았다. 청마는 당시 이영도에 대한 애틋한 연모의 정을 연시로 쓰고 수없이 편지를 보냈다.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사랑하는 것은/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의 너무나 유명한 '행복'이란 이 시는 사랑의 감정을 편지로 쓰고 보내는 행위를 행복이라고 적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편지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주요 매개물이었다. 문인, 예술가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친구나 연인에게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며 가슴을 두근거리는 아련한 정서에 젖었다. 그러나 이런 사적인 편지는 이제 우체국 한 귀퉁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지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휴대전화와 e메일이 우리 생활의 중심부로 들어온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 편지라는 '느림'의 미학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로지 '속도'만을 숭배하는 시대를 맞아 '사랑'이나 '감정'도 패스트푸드처럼 인스턴트화하고 있는 것은 과연 진정한 인간의 내면의 행복을 담보해 주는지 의문이 든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현대의 사랑이란 즉각적이고 쉽게 잊기 쉽다며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는 우리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사람은 사랑하다가 사랑하게 되지 못하는 때 하나는 동무가 되고 하나는 원수가 되는 밖에 더 없다고 하나 이 둘은 모두 다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천재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경 소설가 최정희(1906~1990)에게 보낸 장문의 육필연서가 문학사상 9월호에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인은 이 편지에서 당시 지성과 미모를 갖춰 인기를 끌었던 최정희에 대한 연정을 안타까움과 애틋한 마음으로 토로하고 있다. 문학사상은 이밖에도 시인 조지훈, 노천명 등에게서 받은 18통의 육필 편지도 함께 싣고 있어 당시 편지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아침저녁 제법 가을 분위기를 풍기는 요즘, '속도'와 '경쟁력'이라는 삭막함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마주칠 수 있는 편지 한통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은 어떨까.
신도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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