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꽃 할아버지'이상훈씨

입력 2001-08-20 14:36:00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의 경동 초등학교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아침저녁 학교옆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을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은 더욱 좋겠다. 이 마을 주민들이 산책 삼아 오르내리는 1㎞ 남짓한 산길에 계절마다 갖가지 꽃이 지천으로 피기 때문이다. 산 정상의 작은 평지엔 정성들여 꾸민 화원이 들어서 있다. 처음 이 산길에 접어든 이는 꽃향기에 취하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정성에 놀란다.이상훈(73) 할아버지. 25년 전 이 마을에 이사를 오면서부터 산길에 꽃을 심었다. 매년 수십 포기의 꽃을 심고 물을 주어 키웠다. 산길 중턱엔 아예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가뭄에도 꽃이 말라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정상의 아담한 화원엔 커다란 고무 대야를 갖다 놓았다. 그 덕에 농촌의 못이 바닥을 드러내고 논바닥이 갈라지는 가뭄에도 할아버지의 꽃밭은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예쁘지 않소?" 할아버지가 오랜 세월 꽃을 심어온 이유는 어떤 기막힌 사연보다도 분명하고 절실했다.

할아버지의 집은 작은 식물원 같다. 마당에도 옥상에도 온통 꽃과 나무가 지천으로 덮여있다. 집 담과 이층 베란다에는 아이 주먹만한 키위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 마을 아이들에게 '키위 할아버지'로 통한다.

"수십 년간 꽃을 키웠지만 한 번도 돈을 주고 모종을 산 일은 없소. 친구들 집에서 한두 포기 얻어온 것이 전부요".

할아버지가 산에 심는 꽃은 모두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다. 여기 저기서 한두 포기씩 얻어와 옥상과 마당에서 키우면 이듬해엔 열 서너 포기가 족히 넘는다. 이렇게 키워낸 꽃을 매년 산에 옮겨 심는 것이다. 옮겨 심어둔 꽃들은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저마다 계절에 맞춰 봉오리를 터뜨린다.

그렇게 산으로 이사한 꽃이 산책 나선 주부의 손에 뽑혀도 할아버지는 원망하지 않는다. 죽거나 뽑혀 나간 자리엔 말없이 다른 꽃을 심어 둘 뿐이다.

"좀 뽑아 가면 어떻소? 잘 키울 수 있으면 그만이지" 할아버지는 꽃을 뽑는 주부의 욕심많은 손도, 담 밖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키위를 따내는 초등학생의 호기심 많은 손도 나무라는 법이 없다. 그는 이웃들이 모종을 달라면 모종을 주고, 꽃을 달라면 꽃을 준다. 길 가던 사람들은 공연히 초인종을 눌러 모종을 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인기좋은 키위 모종은 벌써 예약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할아버지는 내심 집 앞 초등학교에 키위 나무를 심고 싶지만 지인들의 성화에 좀처럼 차례가 닿지 않는다.

이상훈 할아버지의 손은 '약손'이다. 때때로 이웃들은 시든 꽃나무를 들고 할아버지를 찾는다. 몹쓸 병에라도 걸린 듯 말라가던 나무도 할아버지의 손이 닿으면 금세 생기를 되찾는다. '약손' 할아버지의 처방은 단 하나 '정성'이다.

꽃과 나무를 울창하게 길러내는 솜씨에 사람들은 이상훈 할아버지가 식물학 박사쯤 되는 줄 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꽃과 나무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 그러니 각각의 나무와 꽃들의 생장특징에 대해서 알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할아버지가 가꾸는 꽃과 나무는 쑥쑥 잘도 자란다. 생명을 키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성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늦가을 된서리가 내려 스스로 뚝뚝 떨어질 때까지 마당의 과일을 수확하는 법이 없다. 할아버지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는 포도, 앵두, 키위, 꽃사과는 모두 된서리에 흠뻑 젖는다. 겨우내 매달아 둔 탓에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저 피고 지는 걸 바라보는 게 좋아요. 무성한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열매는 또 그대로 멋이 있어요".

여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빌딩과 텃밭이 비집고 들어서는 요즘, 할아버지의 꽃 심기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인간적인 안간힘 같다.

'어쩌면 이렇게 잘 키울 수 있습니까?' 산길 꽃밭을 둘러 본 기자의 감탄사에 할아버지는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1등을 한 아들을 바라보는 학부형처럼 웃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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