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처럼 헌법의 개정문제를 식은죽 먹듯 거론하는 정치인들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개헌의 이유가 인신구속요건의 강화 등 기본권 신장을 든 적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모두가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다. 일이 안되면 조상탓으로 돌린다는 말처럼 여야가 사사건건 대립하여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고 불신이 가중되고있는데도 늘상 권력구조, 임기 등 헌법운영에 문제가 있는 듯이 강조하고 있어 어이가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단군이래 처음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체험한 것은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1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이때 선출된 제헌의원들은 5월31일부터 한달반동안 휴일을 제외하고는 헌법특별위원회와 본회의를 거의 매일 열어 전문위원들이 작성한 헌법안을 깎고 다듬었다. 심의도중 고성이 오가는 격론이 벌어질 때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老)의원들이 일어나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였던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잊었는가"고 울먹이며 질타를 하면 격론과 논쟁은 눈녹듯이 양보와 타협으로 급전되곤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회는 7월 16일 헌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17일에는 역사적인 선포식을 거행했다. 어느 선진국의 헌법에 못지 않은 훌륭한 헌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경험도 없던 제헌의원들이 이처럼 탁월한 헌법을 만든 것은 정략도, 당략도, 사심도 다버린채 오직 민주독립국가를 하루빨리 세우려는 애국열정때문으로써 이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인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헌법은 5.16, 유신, 5.18로 완전히 짓밟혀졌고 발췌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3선개헌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집권자들이 성스러운 헌법을 누더기로 만든 것은 한결같이 독재, 장기집권, 권력의 계속 장악을 위한 사욕(私慾), 당략, 정략때문이었다. 헌법을 건드릴 때마다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국민을 피곤하게 했으며 나라의 각 분야가 중병이 들게한 것이다. 결국 1987년 6.10항쟁, 6.29선언에 이어 여야의 합의개헌으로 겨우 복원된 헌법을 건드리려는 움직임들이 고개를 들어 국민들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개헌론은 두 갈래. 하나는 현행 대통령중심제의 임기를 4년 중임제(重任制) 방안과 부통령제 신설방안이다. 현행 5년 단임제에서는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한을 독점행사하여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는만큼 제헌당시의 4년중임제로 환원시키자는 것이다. 또 부통령을 지역주의 완화의 방편으로 즉 대통령이 영남 또는 호남출신이면, 부통령은 호남 또는 영남출신 인물로 안배한다는 것이다.
물론 5년 단임제가 상당한 결점을 지니고 있음은 지난 10여년간의 실험을 통해 입증된다. 하지만 4년 중임제의 경우 재선을 위해 첫 번째 임기를 인기몰이에 열중하는 단점이 크게 우려된다. 특히나 부통령제 신설은 새 권력을 향한 줄서기 풍토, 파벌이 성행할뿐더러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립, 갈등을 빚을 때 부작용과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지역주의 해소는커녕 지역전쟁의 폭발성마저 있는 것이다.또 하나는 최근 민주당 의원 세미나에서 제기된 '통일헌법 제정론'이다. 이는 학자들의 연구적 차원에서 검토되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정치권에서의 논의는 시기상조일뿐 아니라 삼가 내지 경계해야할 문제다.
작년 남북정상회담후 정부는 햇볕정책의 성공이자 구현이라며 곧 통일의 문턱까지 온 것처럼 온갖 화해조치를 다했으나 김정일과 북한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저들은 노동당 규약에 여전히 '당의 최종목적은 적화통일이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 대상을 두고 어떤 장밋빛 헌법안을 구상하고 논의하겠다는 것인가! 성급한 통일헌법 논의는 국민들에게 북한을 잘못 인식케하는 혼선만 가중시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은 어떤 형식과 내용이든 개헌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 더구나 대통령선거를 불과 1년 수개월 앞두고 정략적 냄새가 풍기는 헌법개정 이야기는 숭고한 국가의 기본법을 모독하는 행위다.
어느 정당, 어느 지도자이건 진정으로 나라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개헌을 해야한다면 분명한 이유와 논거를 제시하고 적어도 5~10년을 목표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국민공론에 부쳐야할 것이다. 헌법은 동네북이 될 수 없다. 이성춘(언론인.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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