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힘들지만 행복해요'
흰 와이셔츠에 깔끔한 넥타이, 계산에 밝은 사람, 돈 잘 버는 전문직 종사자.
공인회계사라고 하면 떠 오를만한 고정관념들이다.
그러나 송창섭(41)씨는 공인회계사에 대한 세인의 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그런 사람이다.
방금 논물을 대다 허겁지겁 달려온 듯한 모습,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과 말투. 어쩌면 공장이나 공사판 노동자가 더 어울릴것 같다.
36세 늦깎이 공인회계사
실제로 송씨는 좀 엉뚱하다. 36세란 늦은 나이에 공인회계사가 된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돈 버는데는 게으르다. 딴전(?)을 피우고 있기 때문.
그는 돈이 되지 않는, 아니 돈을 버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시민운동에 열심이다.
공인회계사라면 양심대로 기업 회계만 감시하면 될터인데 사회까지 감시하는 직업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사회엔 자신말고도 수많은 '파수꾼'들이 있는데...
그는 반부패국민운동 대구.경북본부의 시민감시단장이다. 지난 99년부터 지방자치단체의 부패사례를 수집하고 '청렴계약제' 도입을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권유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달서구청이 청렴계약제를 도입했고 대구시와 남구청이 이 제도를 수용하려는 게 성과라면 성과.
지난해에는 대구 대곡초등학교 운영위원에 출마했다. 당시 7명의 운영위원이 '내정'된 상태에서 출마를 선언한 그의 행동은 학교측을 당혹스럽게 했다.
결국 '헌병' 완장을 하나 더 찬 송씨는 학교예산과 학교발전 기부금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 지키고 조언하는 '파수꾼'이 됐다.
공인회계사란 직업이 일거리가 생기면 밤낮없이 바쁜데도 그는 시민운동에 할애한 시간을 아까워 하지 않는듯 하다.
지자체 예산감시 제의 고민
혹함이 없다는 나이 '불혹(40세)'을 넘겼지만 그는 요즘 흔들리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감시 활동을 맡아달라는 대구참여연대의 제의를 받은 뒤 고민에 빠진 것.
"가뜩이나 시민운동을 해 고객인 기업가들로부터 탐탁치 않은 눈총을 받고 있는데 난감하더군요. 같은 법인에서 일하는 동료 회계사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어쨌든 아직 제의를 받아들일지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송씨는 예산감시운동본부장에 내정된 상태.
기자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왜 세상을 이렇게 고민하며 힘들게 삽니까".
그는 질문에 대답은 않고 자신의 20, 30대 시절 방황기를 들려줬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79년에 송씨는 경북대에 입학했다. 대학가에는 민주화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5월의 봄'을 고대하던 그 때였다.
"이념적 무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막연한 정의감에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찾아다녔죠. 그러다 80년 광주항쟁이 내겐 무거운 짐이 됐죠. 대구의 미국문화원에서 외신에 실린 '칼질 안된' 광주항쟁 기사를 접하고 분노와 함께 역사의 짐을 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민주 정권 쟁취가 무산되고 5공화국 정권이 들어서자 대학가는 잠잠해졌다. 그 시절 대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도 울분만 토로하며 공부는 뒷전이었다.
졸업하는 해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사내 노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관련법을 뒤적인 사실이 알려져 상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년 10개월의 직장생활을 접고 무작정 세상 밖으로 나갔다.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원도 송씨가 발붙일 곳이 못됐다. 대학원생들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 4개 대학원이 함께 학생회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학교측과 보직 교수들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그는 '위장 대학원생'이란 오해까지 받으며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1년만에 중퇴했다.
배관공.막노동 등 경험도
다시 노동현장으로 뛰어 들었다. 평생 노동현장에서 치열하게 살겠다는 각오로.86년부터 94년까지 8년동안은 대부분은 포항에서 살았다. 노동문제상담소에서 노조설립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자신도 프레스공, 배관공, 막노동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해 밥벌이를 했다. 그리고 90년엔 대학후배 신경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꿈도 깨졌다. 93년 겨울 경기도 반월공단 조성 공사 일을 하던 중 쓰러졌다. 옴쭉달싹 못하고 혼자 여관방에 사흘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체력이 떨어진데다 건설경기도 침체돼 더 이상 막노동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죠. 일단 대구에 와 고민하던 중 후배의 권유로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게 된 것이죠".
그는 아내와 함께 과외와 학원강사 일을 하며 2년간 공부한 끝에 자격을 따냈다.자신의 인생곡절을 털어놓은 뒤 그는 "힘들었지만 행복했었다"며 웃음을 띠었다.돈을 좀 벌었냐고 묻자 "지난해 1억1천여만원짜리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사실 7천만원은 융자받은 것이죠. 동네 사람들은 제가 일부러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는 그는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조만간 참여연대가 주도하는 '1% 나눠갖기 운동'에 동참할 생각이다.
김교영기자 kim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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