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인들 마음의 고향 잃은 기분

입력 2001-04-30 00:00:00

포항이 지금 '영일대'(迎日臺) 문제로 술렁이고 있다. 시민들의 격조 있는 여가 공간 역할을 맡아 온 이 시설을 '뺏길 수도 있는 상황'이 닥쳤다고 생각하기 때문. 소유자인 포철측이 유명 호텔에 운영을 위탁함으로써, 앞으로는 값비싸고 부자나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여가 공간=포철 주택단지 입구에 있는 영일대는 반지하층에 중식당, 1층에 양식당.커피숍, 2층에 객실 등을 갖추고 있는 시설. 울창한 수목과 사철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수려한 조경에 둘러 싸여 있어 시설은 다소 낡아도 국내 최고 명소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아 왔다. 1969년에 외국인 숙소로 지어졌었다.

그러나 1974년에 포철이 바로 옆에 VIP를 위한 '백록대'(白鹿臺)와 '청송대'(靑松帶) 등 2개의 영빈관을 지으면서 영일대는 일반인용으로 바뀌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지역민들에게 휴식 겸 복합 문화공간의 역할을 맡기 시작한 것.

더욱이 조건은 최상이면서 값은 최저 수준이다. 서비스는 웬만한 호텔급을 넘어 서지만, 이용료는 시중 일반 가게 정도에 불과한 것. 포철 직원들은 물론, 공단으로 출장 오는 외지인들, 일반 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포항의 접객 시설로 자리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민들이 이곳에 갈 때는 스스로 신분이 높아진 것 같이 기분 좋아 할 정도.

◇섭섭한 시민들=포철은 그러나 이런 영일대 경영을 힐튼호텔에 위탁키로 했다. 전문 회사에 맡겨 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것. 이를 위해 지난 연말에 보수 공사가 시작돼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 오는 8월 재개장하면서 힐튼에 넘길 예정.이와 관련해 시민들은 "상업성을 가진 호텔에서 운영하면 값을 호텔급으로 올릴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일부 부자들 외에 서민들이야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하고 있다. "저렴한 값에 고품격 서비스를 받았는데 이렇게 된다니 섭섭하다"며 포철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한 상공의원은 "포철이 포항의 상징이듯 영일대 역시 포항의 상징이요 명소 중 명소인데 외지 업자에게 넘긴다니 뭔가 빼앗기는 기분"이라고 했다.

시민단체 관계자 등은 "그동안 서로 다른 여러 계층이 별 이질감 없이 함께 이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빈부 계층간 갈등 및 과소비 조장의 우려도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포철 직원.가족들은 더한 반응을 보였다. 경제의 문제가 아닌 정서의 문제라며 감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이 압도적. 25년 근속의 김모 부장은 "영일대는 포철과 포항공단의 30년 역사를 간직한 한국 철강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포항공대 한 교수는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영일대 같은 좋은 공간이 있어 지방생활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하면서, "정신과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직원 부인 이모(37.여)씨는 "지금까지는 사실상 회사가 운영함으로써 손익 분기점에만 맞추느라 값이 쌌지만, 상업적인 호텔이 들어 오면 어찌될 지 뻔한 것 아니냐"고 답답해 했다.

◇또다른 우려들=요금이 오를 것이라는 예상에 대해 포철측은 일단 부인하고 있다. 서비스 질은 높이되 가격은 지금 수준대로 하기로 힐튼측과 합의됐다는 것. 본사가 비상경영에 들어 갈 정도로 어려워 보수.유지 비용 부담을 덜려는 것이 운영 위탁의 목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믿지 않는 편이다. 결국은 이용료가 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그래도 편의시설이 부족한 상황이니 만큼 기관.단체들이 앞으로는 각종 행사장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문제가 엉뚱한 감정 문제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지역 정서가 포철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기 때문. 시청 관계자 역시 "자칫 이 문제가 불필요한 포철-지역 사이의 감정 악화를 부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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