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입력 2001-04-23 15:25:00

◈주부독서회 '나리뫼'회원들"이웃이나 친구들과는 이야기 주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죠. 일상사에 대한 가벼운 얘기들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뭔가 다른 게 있어요. 아이들 키우느라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은 느낌이랄까요".

대구 동부여성문화회관 독서지도.매체활용교육 16기 동우회 '나리뫼'(회장 백영옥.회원 김영희, 정미연, 정임숙, 여은하, 박경선, 이정옥, 류은영, 금경희, 이정남, 황정자, 곽인선)의 12명 회원들. 30세부터 44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지만 생기가 넘쳐흐른다. 함께 모여 공부하다보니 그새 젊어진 걸까? 나이 차 없는 친구들처럼 까르르 잘도 웃는다. 영락없는 소녀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젊게 만들었을까? '책 읽는 엄마, 공부하는 아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이들은 주제별로 정해진 책을 읽고 2주마다 모여 책 내용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박경리의 '토지', 이청준의 '눈길' 등 문학서적 뿐 아니라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최재봉), 환경관련서인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지난 해 핫이슈가 됐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택리지'(이중환) 등 꽤나 어려운 책도 예외는 아니다.

독서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세 번 정도의 정독이 기본이기 때문. 페이지를 되넘기며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으며 나이탓, 썩은(?) 머리탓을 지능지수의 한계일까 생각할 즈음 겨우 문맥이 트인다고 했다.

의욕이 넘쳐서일까. 독서토론에만 매달리지도 않는다. 백영옥 회장(44)은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단체로 영화 '쿤둔'을 보러 가기도 하고 문화유적지도 탐방했죠. 올핸 네 차례 가족문학기행을 계획하고 있어요". 어떤 회원들은 아이들과 함께 만든 NIE(신문활용교육) 실습지를 들고와 발표하기도 한다. 미술전시회 관람도 빠트릴 수 없는 항목. 이쯤이면 '나리뫼'는 단순한 주부독서모임이 아니다. 문화모임에 더 가깝다.

동우회가 자리잡기까지는 이 모임을 지도하고 있는 이충희(48)씨의 역할이 컸다. 책 선정과 NIE 지도, 미술전시회와 볼만한 영화고르기까지 책임진다. 독서지도.매체활용교육의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났던 그들은 4개월간의 과정 수료후 지난 1월 동우회를 조직, 다시 만났다. 마치 떨어질 수 없는 바늘과 실처럼. 이들의 만남은 읽은 책이 쌓일수록 더 다져진다.

"엄마가 책읽어야 아이들도 책을 읽죠. 자녀교육 방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1, 2등을 위해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기보다 산 교육이 더 중요해요. 이를 위해서라도 주부 재교육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씨는 주부들이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제대로 끄집어내기만 하면 아이들 교육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 공부도 하고 아이들의 공부도 돕는 뿌듯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것.

TV 퀴즈프로를 보던중 마침 읽고있던 책과 관련된 문제가 나와 쉽게 맞췄다는 황정자(31)씨는 "당신, 용(龍)됐네"라는 남편의 농담에도 즐겁더라고 했다. 경산에서 매번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황씨는 "남편도 이 모임만큼은 어서 가보라고 떠 밀 정도"라고 말했다.

김영희(41)씨는 "혼자서는 읽기 쉽지 않은 책들을 접할 수 있고 공부하는 모습을 통해 가족들이 나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남편에만 의존하던 자신을 자립시키는 계기가 된 것도 큰 성과. 때로는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다 아침밥을 놓쳐도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는다. 시간을 쪼개 쓸 만큼 할 일이 생기니 남편에 대한 바가지도 줄고 부부싸움도 없어졌다.

"책읽다 보니 관심분야도 달라져요. 이젠 패션, 성형수술, 미용 등에 대한 관심보다 책욕심이 더 생깁니다". 스스로 공부해서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정임숙(38)씨. "이젠 여행을 가도 목적있는 여행을 합니다. 가고싶은 곳의 자료들을 아이들에게 미리 찾아보게 하고 떠나죠". 그래선지 아이들이 사회과목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고.

어쩔 수 없이 또 '결론은 아이들'이었다. 지금까지도 자신보다는 아이와 남편 위주로 살아왔던 그들. 자식에겐 유명 브랜드 옷도 사주고 남편에겐 고급 자동차까지 사주면서 정작 자기를 위해선 책 한권 사기에도 망설이는 것이 한국 아줌마들의 특징. 독서토론도, 문화유적 탐방도, 영화보기도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한 목적 보다는 날로 똑똑해져 가는 아이들과의 대화에 처지지 않기 위해,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 정서발달에 좋다기에 더 열심을 내는 아줌마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래도 이들 책 읽는 아줌마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다. 팽팽한 생기도 있다. 분명 '나리뫼' 회원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어디에서고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아줌마들이다. 다만 늘어진 일상에 파묻히기를 거부하고 자기를 잃지않으려 애쓰는 이 시대의 신(新)아줌마, 공부하며 가정을 경영하는 '가족 CEO(최고경영자)'들일 뿐이다.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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