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 기자의 시네마&라이프-영화와 경기의 함수는

입력 2001-01-06 14:21:00

경기가 나빠지면 치마가 길어진다고 했던가.

그럼 영화에선 어떤 함수가 있을까. 80년대 미국에선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찬 영화들이 쏟아졌다. 대표주자가 스티븐 스필버그. 'ET'를 비롯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로 관객들을 알싸한 가상 모험 세계로 몰아넣었다. 쌍벽인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로 관객을 판타스틱한 우주로 안내했다. 또 '터미네이터''프리데터' 등 유달리 SF영화들이 많았으며 '람보'와 '록키' 시리즈 등 인간승리의 영웅주의 영화들이 판을 쳤다.

당시 미국은 누적된 재정적자로 허덕일 때였다. 전자총에 외계괴물,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기이한 전쟁 영웅과 마이더스식 활극. '꿈의 공장'이라는 할리우드답게 달착지근한 환상영화로 힘들고 고통스런 미국민들을 '위문공연'했다.

최근 들어 호황을 맞으면서 미국영화에서 이런 판타스틱한 면이 많이 사그라 들고있다. 오히려 '아메리칸 뷰티''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 드라마성 강한 영화들이 강세. 경제가 살아나면서 가공의 세계보다 현실로 눈을 돌리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작품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할리우드의 자성도 이런 느긋함에서 나온 현상.

그렇다면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는 한국은 어떨까?

'유령''자귀모''비천무''단적비연수''리베라 메'…. 최근 영화들을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세계가 한국영화의 주 레퍼토리다. 곧 나올 영화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고려무인의 이야기 '무사', 항공첩보 액션물 '에어 2003', 미래 인간과 사이보그의 대립을 그리는 '내추럴 시티', 가상 현실속의 액션 판타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어느 것 하나 현실성있는 영화가 없다.

적금 깨고, 실직에 이혼까지 당하고, 급기야 죽음까지 생각해 보는 고통스런 캐릭터는 어디에도 없다. 칼바람을 일으키며, 장풍 하나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무소불위의 인물들만 난무한다.

80년대 한국에선 에로영화가 '창궐'했다. '뽕''어우동' 등 향토성 짙은 에로물에서부터 '애마부인''무릎과 무릎사이' 같은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광고문구에 '에로틱'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가 드물었다. 광란의 정치현실로 어두운 사람들의 마음을 '옷 벗기기'로 어루만진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간절한 바람들이 영화에선 환상으로 구현된다.

다시 우리 경제가 짧은 치마 입고 여유 있게 눈웃음칠 수 있기를 비는 마음. 비단 나뿐일까. 특히 대구 사람들이라면….

김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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