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가 본 고난의 2000년

입력 2000-12-29 15:14:00

"올 초였어요. 새벽에 시내에서 택시를 탄 50대 남자가 앉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더군요. 한참만에 말문을 연 그는 운영하던 전자대리점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살던 집도 날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겁니다. 그러고 또 울더군요. 할 수 없이 차를 세워놓고 20분동안 아저씨를 달랬습니다. 용기를 잃지말라고. 저도 힘든 처지이면서 말입니다"

2년째 택시를 몰고 있는 정재호(37.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씨의 눈에 비친 지난 1년은 온통 고단한 서민들의 삶 뿐이었다.

"승객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승객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플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경기가 다소 풀렸던 지난해만해도 승객들의 얼굴에 다소 여유가 있었고 대화도 정치나 지역감정 따위가 주였죠. 그러나 올해는 살길이 막막하다는 한숨소리만 싣고 다닌 것 같습니다"

희망으로 맞은 2000년 첫 해는 연초부터 현대그룹 사태로 국가경제가 비틀대기 시작, 일년 내내 구조조정, 실직, 부도, 주가폭락, 노숙자, 생계형 범죄, 물가앙등 같은 어두운 뉴스가 이어졌다. 그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이리저리 치이며 만신창이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연말의 저녁 퇴근무렵 정씨의 택시안. 서류가방을 든 회사원은 "수입은 줄었는데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번 구조조정 명단에서 빠져야하는데… 요즘은 아빠노릇하기 힘들다" 는 푸념을 그치지 않는다. 경기침체로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부인과 단둘이 회사를 꾸려나간다는 50대 영세업체 사장, 초저녁부터 술에 절은 샐러리맨, 오늘도 일자리를 허탕친 실직자, 최악의 취업난을 호소하는 대졸자 등도 한결같이 지친 모습이다.

이같은 승객들의 푸념을 받아주는 정씨 자신도 고통스런 사연을 안고 있다. 대학졸업후 3년 남짓의 전자업체 직원생활을 마감하고 97년 9월, IMF가 오기 꼭 두달전 대구 3공단에서 식품회사를 차렸다. '정 사장'은 어음거래도 않고 회사를 꾸려나갔지만 IMF를 피할 길이 없었다. 1년 반만에 회사는 부도가 났고, 이리저리 돈을 끌어다 빚잔치를 하고나니 남은 것이라곤 3천만원짜리 소형 아파트 전세가 전부였다. "정말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매일 방안에서만 누워지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 딸의 그림 숙제속에 침대에만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이 있었어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씨는 KS택시회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핸들을 잡은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차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고,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해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의욕이 생겨났다. 새 꿈으로 개인택시를 목표로 잡았다.

"인생은 절망만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밝게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지니까 인생이 그리 고달프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차의 승객들이 웃음만은 잃지 않았으면 해요. 용기를 가지면 언젠가는 활짝 펼 날도 온다고 믿습니다. 승객여러분, 힘내세요"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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