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입력 2000-12-11 14:25:00

근대전쟁에서 무기, 특히 포화의 중요성을 선각하고 1차 대전에서 조국을 수호한 영웅 페탕 원수(元帥,1856-1951)-. 이 무인(武人)이 프랑스 국민의 최고의 영예인 문인들의 전당 한림원(翰林院·아카데미 프랑세즈) 멤버로 뽑혀 입당하는 날,한림원과 프랑스를 대표해서 환영사를 읽은 시인 폴 발레리는 "당신은 베르당을 수호하고 국군의 혼을 구원했다"고 칭송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히는 베르당. 시인 아폴리네르,화가 프란츠, 마르크, 작가 샤를 페기…. 아니 그 누구나가 '저마다 유일한' 목숨을 200만명이나 이곳에 내다바쳐 조국을 지킨 격전지 베르당을 나도 비극의 50돌을 맞는 1966년 한 번 찾아본 일이 있다.

1차 대전때 페탕 원수가 한 역할을 2차 대전때 프랑스를 위해서 수행한 사람이 드골 장군. 페탕과 그보다 34세나 연하인 드골과의 사이를 잇고 끊는 운명의 연줄은 기이하다. 1916년 2월 청년대위 드골이 베르당에서 부상하고 포로가 되자 군단장 페탕은 드골이 전사한 줄 알고 그날 밤 일지에 촉망됐던 젊은 중대장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글을 남겼다. 페탕과 드골 사이를 오고간 죽음의 공던지기의 시작이다.

2차 대전이 발발,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드골은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대독항전을 주도했고 페탕은 비시에서 대독협력 정부의 수반이 되어 드골에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한다.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 파리가 해방되자 돌아온 개선장군 드골이 이번엔 부역자 페탕의 사형선고에 서명을 한다. 한편 프랑스를 대표해서 1차 대전의 영웅 페탕을 칭송한 발레리가 2차 대전 종전 직후 타계하자 제4공화국 초대 총리 드골은 국장(國葬)으로 시인의 죽음을 예우했다.

페탕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드골에 의해서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전락한 페탕은 그뒤 6년동안 외딴 섬에 갇혀 살다가 네살 모자란 100세의 삶을 마감한다.

양차 대전의 숙적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와 친선이라는 새 역사의 장을 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대독 레지스탕스의 영웅 드골이었다는 사실도 기이한 아이러니이다. 1962년 9월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드골은 서독 각지에서 독일말로 연설하여 독일국민을 감격시켰다. 특히 루트비히부르크성(城)에서 2만명(!)의 독일 청소년들 앞에서 한 연설은 이따금 그 녹음 테이프를 틀어볼 때마다 레토릭의 일품이라 여겨진다.

"독일 민족은 위대한, 암 그렇고 말고, 위대한 민족이라"고 옛 적국을 치켜세우면서 라인강의 젊은이들을 흥분, 환호케 한 드골은 "그러나 독일민족은 지난 날의 역사에서 이따금 커다란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다"고 곧이어 드골이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그러면 들끓던 장내가 금방 숙연해진다.

역적 페탕에 대한 감형, 숙적 독일에 대한 화해는 좋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 친선과 협력에도 따질 것은 따지고 지켜야 할 한계는 지킨다는 드골의 의연한 면모가 풍기는 고사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더 평가되고 있는 듯 싶다. 내게는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가 그가 발행인으로 있는 '디 차이트'지에 공개한 축하 전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DJ의 세 전선에서의 화해, 그를 지워버리려고까지 했던 국내의 정적(政敵)에 대해서, 반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북쪽의 스탈린주의적 독재자에 대해서, 그리고 왕년의 식민지 점령국가 일본에 대해서 DJ의 화해정책은 한결같고 성공적이었다고 슈미트는 적고 있다. 원수들에 대한 참으로 통 큰 DJ의 용서와 화해요, 그의 정곡을 찌른 외국인의 찬사이다. 거기에 토를 댈 사람은 없겠다. 다만 국내에서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지킬 것은 지키고 따질 것은 따지는 용서와 화해의 분명치 않는 한계이다. 군부·신군부정권에 대해서,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서….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