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1년 4월, 우리 가족은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서 살고 있었다. 연수차 일본에 간 남편을 따라간지 4개월째. 너무도 이질적인 문화에서 오는 충격도, 말에서 비롯되는 불편함도 나는 조금씩 극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몸짓 언어가 어설픈 입말을 대신해 의사소통의 훌륭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삼년 더 일본에서 살아도 그다지 힘들거나 불편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간간이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직장동료들과 도쿄(東京)의 우에노(上野)공원에 놀러갔다. 주말이라 공원에는 벚꽃축제를 즐기러온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머리카락에 색색의 물을 들인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린 여자애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다니는 광경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이들의 모습 뒤에 겹쳐 보여서 당혹스러웠다. 과연 우리에게도 문화적 정체성이란게 있을까.
저녁식사 뒤, 일행들을 두고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낮에 보아두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온 뒤, 돌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분명 길이라 생각하고 가면 또다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이제는 맞겠지 생각하고 가면 다시 같은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이제 캄캄한 밤이다.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이 능숙하면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어떻게 하나. 하기야 말을 할 줄 안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내가 있었던 곳이 대체 어디쯤이었는지 모르거늘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면 일행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일행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어디일까. 다름아닌 전차역. 올 때도 그곳으로 왔으니 갈 때도 그곳으로 가리라는 생각을 했다. 팻말을 따라서 걸어갔다. 전차역에서 일행을 만나니 벌써 열한시반. 아주 힘들 때면 나는 그때를 생각한다. 제가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형국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어떤 상황에서든 출구만 찾으면 된다고. 그 출구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삶이란 제 스스로 제 출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그 때의 그 경험이 일러주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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