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버림의 미학

입력 2000-11-27 14:11:00

서랍이나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버릴까 말까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있다. 오래 묵은 신문스크랩, 노트 따위를 넣어둔 빛바랜 메리야스 상자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고전적 자료들이 이미 정보 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엔 버려야 할 것들, 하찮은 것들도 이럴진대 정말 공들여 모은 것은 어떠하겠는가? 정녕 버린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가!

취미로 난이나 수석을 채집하고 애호하는 사람들-나는 이들을 우러러보고 또한 부러워 한다. 한 포기의 풀, 한 개의 돌멩이를 찾아 산야를 누비고 하천을 헤매는 그 지극한 열성과 근면성,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미적 감수성에 감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물신주의의 유혹을 멀리하고 생명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물외한인(物外閒人: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한가로이 사는사람)으로서의 고아한 기품을 좋아한다. 그러나 취미 생활의 정도를 넘어 주거공간을 온통 내줄 정도의 엄청난 물량으로 보는 이를 제압하는 경우에는 선뜻 동의할 생각이 없다. 거기에는 '멋'이니 '운치'니 '즐김'이니 하는 여유로운 언어들 대신에 '소유'니 '욕망'이니 '과시'니 하는 세속적 언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소유자의 지배를 받다가도 일단 세력이 커지면 소유자를 지배하려 든다. 곧 알맞게 가질 때는 인간 생활을 여유있고 윤택하게 하지만 지나칠 때에는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오히려 마음을 좁고 가난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백 없는 동양화를 상상해 보라.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나 새, 그리고 경치라 하더라도 탐욕적으로 자꾸자꾸 그려 넣어 화폭을 죄다 매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버림'의 아름다움-잎 지는 이 가을에 그 푸르른 여름날의 꿈을 미련없이 버리고 새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나무처럼 나도 이제 서랍과 책장을 말끔히 정리하고, 또한 한 해의 부질없는 욕망과 기억과 회한을 버리고 겨울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경주 아화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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