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수험생 학부모들의 자화상

입력 2000-11-22 14:30:00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끝난지 일주일. 수험생도 아닌데 갑자기 느긋해진 하루에 스스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수험생의 부모들. 시험 문제지를 받아 들지 않았을 뿐, 그들도 어지간히 힘든 한해를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아이가 고교 3년이 되면 학부모들도 함께 고3이 된다. 아이의 등교를 맡은 아버지들은 이른 새벽부터 잠을 설친다.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 한잔 나누는 일에도 눈치를 살핀다. 늦은 밤 다시 아이를 데리려 가야 하기 때문. 아내가 운전할 줄 아는 운좋은 남편이라고 상황이 다른 건 아니다. 술냄새 풍기며 집에 들어 섰다가는 무심한 아빠로 몰리기 십상이다.

어머니들은 TV 드라마조차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다. 반찬에도 더 마음 써야 한다. 홧김에 빽하고 소리 치려다가도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거실을 걸을 때도 조심조심, 설거지도 살금살금, 나누는 이야기도 소근소근…. 어떤 어머니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난생 처음 운전대를 잡기까지 한다.

대구 범물동 아파트에 사는 박태호(48·가명)씨는 지난 일년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깼다. 항상 먼저 세수를 끝낸 뒤 딸을 깨웠다. 목욕탕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느라 아이가 시간을 낭비하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서.

6시엔 딸아이를 태우고 학교로 달린다. 10분이라도 늦으면 낭패. 아이들을 태우고 나타난 차들로 학교 앞이 북새통이기 때문이다. 멀찍이 아이를 내려줘도 될 테지만 부모 마음이 어디 그런가?

그런 다음 중구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면 기껏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업무 시작 때까지 매일 1시간20여분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신문을 뒤적이고 속절없이 담배를 피워댄다. 담배가 타는지, 속이 타는지….

그의 속을 태운 일은 또 있었다. 학년초 성적이 비슷하던 딸의 짝꿍 성적이 일년여 과외 끝에 30점이나 올랐다지 않는가! 월급쟁이 뻔한 월급으로는 감히 넘보기 힘든 일. 딸에게 미안하고 안쓰럽다.

또 다른 수험생 아버지 김해문(51·대구 신천동)씨. 그는 20여년 직장생활 내내 즐기던 술을 끊었다. 예체능계인 아이는 야간 자습은 물론이고 특기학원까지 다녀야 했다. 수업을 마치면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학원에서 학교로, 또 집으로…. 이렇게 아이를 태우고 다닌 것이 그의 지난 일년간 퇴근 후 일과였다. 속 모르는 이들이 술 끊은 독한 사람이라고 말할 땐 그저 웃고 있어야 했다.

아이의 친구까지 태우고 등교시켜 왔던 김재원(52·대구 용산동)씨는 요즘 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했다. 수능이 끝난 뒤 긴장이 풀린 때문일 것이라는 게 부인의 풀이. 재수까지 포함해 꼬박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났던 것이다.

밤 12시를 넘겨 아이를 데려오는 일은 부인이 맡았다. 늦은 밤, 천근의 무게로 꺾이는 목을 가누며 집을 나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에 깨는 것이 버릇 된 어머니, 수능이 끝난 요즘 7시까지 그냥 누워 있으려니 허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했다.

"아이가 열심히 해주니까 고맙지, 우리가 뭐 한 거 있다고…". 김씨 부부는 그래도 아이의 고생을 더 쳤다. 아버지·어머니가 치르는 입시, 얼마나 힘든 시험이었는지 아이들은 알까?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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