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구려 옛 땅을 가다'란 시리즈를 통해 광활한 만주벌판을 지나 몽고와 중앙아시아까지 호령한 고구려의 자랑스런 조상과 역사를 확인했다.
고구려 최초의 수도, 환인(桓仁) 오녀(五女)산성의 2천년전 신비 등 지금까지 국내에 공개가 되지 않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상당수 보도, 고구려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천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고구려의 성, 찬란했던 문화를 더듬어 보는 단초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벽화, 현지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국내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고구려 찾기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를 너무도 백안시해 왔다. 중국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는 사대주의 사관으로 일관했다. 고구려의 역사를 한 눈에 파악하게 하는 세계 최고의 금석문 '광개토대왕비'. 조선시대 용비어천가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기껏해야 금나라 시조의 비석 정도로만 기술돼 있다.
대국들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어떻게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았을 수 있겠느냐고 지레 적극적인 추적을 포기한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식민사관을 받들어 정당한 우리의 역사도 축소하고 깔보려 했다. 식민사관은 우리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한다. 수.당과의 전쟁을 보자. 당시 백만대군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대군이었다. 그런 군대를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한 것이 고구려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만대군을 물리쳤다는 것을 강조하면 조선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킨다고 본 것이 일본이었다. 당연히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보다 수나라와의 싸움에서 국력을 소진한 나머지 궁핍해졌고 멸망으로 연결됐다는 논리로 역사를 왜곡시켰다.
전문가들은 고구려가 수.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막강한 군사력뿐만 아니라 거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보고있다. '고구려의 발견' 저자 김용만씨는 이를 "고구려 문명의 힘"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위대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윤명철 탐험문화연구소장은 "우리는 남의 눈으로 다른 세계를 해석한 틀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미래를 규정짓고 남의 모범 답안지를 손에 든채 우리 문제를 풀어왔다"고 규정했다.
우리의 기록이 없다 보니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를 통해 고구려를 해석했고 자연히 그들의 의도에 의해 우리 역사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군사국가 또는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나라였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찬란한 문화 및 기술적 진보 없이 700여년을 지속하는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1천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흐트러짐이 없이 '동방의 피라미드'로 남아 있는 장군총은 과학 기술과 물리학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한 축조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
고구려 무덤이나 유적지 등에서 발견되는 각종 무기들의 재질은 현재의 초금속합금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강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실험에서 확인됐다.
고구려는 세계 최초로 아이젠을 신고 겨울 전투에 임했으며 말까지 갑옷을 입힌 기마부대를 운용,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가 활동하던 시기 중국은 한나라가 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385년간 무려 20여개의 나라들이 명멸했다. 진한시대 이후 300년 이상된 나라가 송나라(320년) 하나뿐이다.
문화적 독창성이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면 정치.문화적으로 종속돼 버린다. 군사적으로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한족에 동화돼 버린 북방 유목민들의 예에서 잘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중국에서 들어 왔지만 중국보다 훨씬 뛰어난 기법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전문가인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벽화에 나타난 수레나 무기 등을 분석해 볼 때 고구려는 강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고 말했다.
고도의 기술력이 없으면 수레를 만들고 적과 싸워 지지 않는 무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면적은 어떠했는가. 김용만씨는 "서쪽으로는 요녕성 조양, 북쪽으로는 현재의 하얼빈,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쪽으로는 충청도 및 울진 지역까지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행사됐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고구려를 모르는데는 우리 역사 연구가 신라 중심으로 이뤄져 온 것이 큰 요인이다. 북한에 유적이 집중돼 있었고 중국과는 수교가 늦어져 고구려에 관한 유물 연구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탓도 크다.
서길수(고구려 연구회 회장) 서경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정통성 확립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시 한번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일어설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기 위해서도 고구려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시급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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