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고향에 들렀더니, 온 마을이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소리가 들릴 듯 했지만,그 흔한 강아지마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다 낯익은 대추나무를 발견했다. 어릴 적에 오가며 대추를 따먹던 골목이었다. 문간에 들어서니 그때도 할머니셨던 동네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지만,나를 돌아가신 아버지로 착각하고 계셨다.
인사도 올릴겸 방에 들어서니 그곳엔 시간이 멈춰있었다. 아직도 60년대의 12달 한 장 짜리 달력들과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크게 찍힌 신문으로 도배된 벽,멈춘지 오랜 까만 괘종시계,씨옥수수 몇 자루. 그런데 옆의 액자에는 놀랍게도 그 시대의 삶까지 박제되어 있었다. 액자 가득 빼곡이 온 집안 대소가 사람들의 수많은 흑백사진들이 서로 겹쳐있었다. 알 듯 말 듯한 얼굴들 밑에는 사진마다 고전적 필체가 찍혀있었다. '잊지못할 동무들이여!' '뒷동산에 모여서' '경축,혼인에 즈음하여' '병신년 오월,백일마저…' '그리운 학창시절이여!' '화전놀이 하던 날' '나에 사랑 그대와…'
어쩌면 이 낡은 액자는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증언일지도 모른다. 이젠 동무라는 말조차 사라졌고 그 소꿉친구들마저 거의 만날 일 없지만,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잊지말자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뒷동산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지만, 그때 우리는 뒷동산에서 소먹이면서도 잘만 놀았노라고. 군복입은 저 아저씨는 이미 늙고 이혼한지 오래지만,그때는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노라고. 고된 농사철이 코앞에 닥쳤어도,진달래 꽃잎 떠내려오는 냇가에서 꽃맞이도 했었노라고. 인생은 과연 살 가치가 있는지 묻곤하는 나에게도,오래 살겠다고 실타래를 잡은 채 축하받던 백일이 있었노라고…. 누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그냥 이 낡은 액자를 보여주고 싶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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