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산을 바라보니, 이땅에 내리는 축복처럼 낙엽이 떨어진다. 그들은 말없이 쌓여 새로운 생명의 거름이 될 것이다. 낙엽은 사실 나무들의 배설물이다. 그들은 여름동안 뿌리로, 잎으로 가리지 않고 영양분을 빨아들이지만 가을이 깊으면 한해의 자람에 불필요한 독소나 남은 영양분을 잎으로 보내어 털어버린다.
풍요 속의 독소와 비만을 알아보는 것. 가장 화려한 것처럼 보일 때 버릴 줄 아는 것. 그것이 해마다 자라는 나무의 철학이요, 나이테는 늘어도 결코 늙지 않는 나무의 여유이다.
고향집에 감을 따라 왔다가 오는 길이 막혀버렸다. 인근 주왕산에 온 단풍 행락객들이란다. 조금만 여유를 부리면 즉시 빵빵거리고, 추월해 오고, 낙엽지는 거리에서 마저 여유는 지탄의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비단거리에서 뿐이랴! 우리들의 직장에서, 거래선에서, 학교 진학에서 집 마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새치기를 일삼던 뜨거운 여름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가을이다. 나도 가을이요, 우리 나라도 가을이다.
이제 낙엽지는 거리에서는 고급 승용차보다는 2차선으로 유유히 가는 차가 부럽다. 드물긴 하지만 가로수를 따라 여유를 부리면서 추월하라고 오른쪽 깜빡이를 넣는 차는 더욱 부럽다. 그들은 계절에 어울리는 삶의 유행을 미리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을에 맞게 삶의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도 급히 추월까지 해가며 달려 왔던가? 결국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 가을에는 또 한겹의 단단한 나이테 위로 새싹을 틔우기 위해 단풍을 버리는 나무의 철학을 배우고 싶다. 그저 늘이고 차지하고 성장하기 위해 급히 채워놓은 이 잔. 지난 여름의 잔을 비우는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면 보다 익은 술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대구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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