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브란트와 흐루시초프

입력 2000-10-30 00:00:00

유럽의 긴장완화와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빌리 브란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옛소련의 붉은 '계몽군주' 흐루시초프와 두 번이나 만날 기회를 무산시켜 버렸던 모양이다. 그 얘기가 오늘의 남북한 관계를 성찰하는 데도 시사적이라 생각되기에 소개해 본다.

1959년 봄 인도방문을 마친 브란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귀국도중 빈공항에 중간 기착을 한다. 그곳에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당시 오스트리아 외무차관이 나와 있었다. 브란트와 크라이스키는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와 함께 다같이 뒤에 총리가 되어 2차 대전 후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반공(反共) 온건주의 노선으로 이끌면서 서유럽의 복지국가 건설에 기여한 트리오요, 가까운 친구였다. 빈공항에서 브란트를 영접한 크라이스키는 흐루시초프가 동베를린에서 만나고자한다는 초청을 전했다. 이 대목을 브란트의 회고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것은 나를 만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초청받은 사람이 초청해주기를 간청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 오래된 러시아의 전통이다"

금년 6월 평양의 남북정상회담 성사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남쪽은 북쪽의 "초청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다고 발표한 것과는 달리 북쪽은 남쪽의 "요청으로" 방북이 이뤄진 것으로 발표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계가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스탈린 치하의 옛소련보다 더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요, 북한외교는 러시아보다도 더 러시아적인 데가 있다.

브란트.흐루시초프 회담은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후 흐루시초프는 다시 브란트에게 이른바 러시아식 초청을 동베를린의 아브라씨모프 소련대사를 통해 전해왔다. 뿐만 아니라 서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의 두 총영사를 통해 브란트를 만날 용의와 시간까지 전갈해왔다.

그때는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직후였다. 분단도시의 시장으로서 브란트는 베를린 문제의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선 흐루시초프와의 직접대화는 필요하고 소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브란트는 본의 연방정부에 찬부를 타진했다. 기독교민주당의 아데나워 당시 총리도 외무부장관도 반대하지는 않고 브란트에게 결정을 일임하겠다는 회답이 왔다.

문제는 본의 연방중앙정부가 아니라 베를린의 지방정부에 있었다. 붉은 동독땅 깊숙이 고립해 있던 분단의 '전초도시' 서베를린은 브란트의 사회민주당이 시의회에서 압도적 다수의석을 확보하고 있어도 언제나 동베를린과 동독에 대하여 서베를린의 단합을 위해서 기독교민주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아데나워 총리도 반대않고 있는 브란트.흐루시초프 회담을 베를린 시정부의 암렌 부시장(기독교 민주당 출신)은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베를린 시의회의 다른 기민당 출신 의원들은 오히려 반대에 소극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암렌 부시장은 만일 이회담이 실현된다면 연립정부에서 탈퇴하겠다고 초강경의 입장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 시의회 선거는 코앞에 닥쳐와 있었다.

결국 브란트는 마지막 순간에 흐루시초프의 초청을 거절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물론 브란트는 자기의 거절이 흐루시초프를 무안케 하는 퉁명스런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먼 훗날의 회고록에서 아브라씨모프 당시 주동독 소련대사는 "흐루시초프가 브란트의 초청거절 전갈을 듣자 너무 놀란 나머지 침실에서 갈아입던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 조차도 모르고 망연자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에 대해서 브란트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공산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모스크바의 권력자 앞에 두쪽으로 갈라져 싸우다 결단난 시정부를 등에 업고 대좌한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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