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또다시 피바람,UN, 3일 안보리 긴급 소집

입력 2000-10-03 12:03:00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 사태 해결을 위한 국제적 움직임이 3일 본격화됐다.

UN은 이 사태를 다루기 위한 안전보장 이사회를 한국시간 3일 오전 7시(뉴욕시간 2일 오후 6시) 소집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내일(4일) 양측의 바라크 총리 및 아라파트 수반과 회동, 유혈사태 방지를 위한 회담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은 이번 사태와 관계 없이 중동 평화협상이 계속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아라파트 수반, 요르단 국왕, 이집트 대통령, 시리아 대통령 등 아랍권 정치 지도자들은 잇따라 긴급 아랍권 정상회담 개최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이란은 전면적인 전쟁을 주장했다.

현지에서는 충돌 5일째이던 2일에도 유혈사태가 이어져, 지금까지 사망자가 56명에 이르렀다. 이날 이스라엘 경찰과 팔레스타인 무장병력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전쟁을 방불케하는 교전 상태로 들어갔다. 또 1949년 1차 중동전쟁 때 설정된 휴전선 때문에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이 된 아랍인들 100만명도 이날까지 사흘째 총파업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9명이 희생됐다.

#피바람 부른 샤론

이번 사태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던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당 당수 아리엘 샤론(72)은 '불도저'로 불려왔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맹렬히 반대해 온 극우세력의 대명사.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베긴 전 총리는 "그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총리실로 탱크를 몰고 올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외무.국방.농무장관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9월 리쿠드당 당수에 오른 그는 "바라크 총리가 예루살렘을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것은 역사적인 실수"라며,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해 왔다.

20여년 전 농무장관 시절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 지도를 처음으로 작성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막기 위해 산 꼭대기에까지 전략적으로 정착촌을 만들도록 했다. 자신도 정착촌 지역에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다.

이번 상황도 그가 예민한 시기를 골라 금지된 지역인 동예루살렘 이슬람 성지에 들어감으로써 유발됐다. 이스라엘인들도 이 성지에 자유롭게 출입해 왔으나, 지도자들의 출입은 이슬람 존중 입장 때문에 금기시돼 왔다. 그런데도 그가 들어간 것은 "이곳도 이스라엘 땅"이라는 시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문에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2일 샤론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분쟁의 핵심 동예루살렘

중동 평화협상의 갈짓자 걸음을 하고 있는 최대 걸림돌이 바로 동예루살렘에 있는 구시가지이다. 이것은 회교도는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곳.

동예루살렘 남동부에 있는 구시가는 4만2천평 정도 넓이의 직사각형 모양 땅.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7C쯤 만들어진 바위돔(아랍명=오마르사원), 8C에 만들어진 알-아크사 사원 및 성전산(템플 마운트), 통곡의 벽 등으로 이뤄져 있다. 벽 내부는 기독교 지구, 이슬람교 지구, 아르메니아인 지구, 유대인 지구 등으로 구분돼 있다.

회교도에게 이곳은 메카.메디나에 이은 3번째 성지. '알-아크사'라는 말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모하메드의 조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위돔'은 모하메드가 천국으로 향했던 장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도 이곳을 '솔로몬의 신전이 세워졌던 곳'이며, 하느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려준 성지 중의 성지라고 여기고 있다.

율법은 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를 경외한다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회교 사원을 파괴 해서라도 신전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할 목적으로 이를 어김으로써 회교도들과 마찰을 빚어 왔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이곳을 강점했다. 이때문에 1990년 10월에는 충돌이 발생해 팔레스타인인 18명이 사망했고, 1996년 9월에는 우파의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당시 총리가 회교 사원 인근에 고고학 탐사를 위한 터널 입구를 건설키로 결정하는 바람에 사흘간 시위와 폭

이처럼 유혈사태가 계속되자 예루살렘을 '국제적인 성지'로 만들자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1967년 중동전으로 수포가 됐다. 이 방식은 최근에 다시 논의되고 있다.

외신종합=朴鍾奉기자 paxkore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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