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최강의 세력을 지녔던 고구려. 그러나 불행히도 고구려는 화려했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해줄 기록을 우리들에게 거의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연구가 김용만씨는 고구려를 '실패한 역사'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기록이 아닌 중국·일본의 기록이나 후세의 사가들이 사대주의 관점에서 쓴 기록을 통해 고구려를 보는 자료의 빈곤 속에서도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가고 있으니 새삼 고구려가 위대해진다.
기록과 문화·유산은 훼손됐더라도 고구려를 지탱했던 힘의 중심인 사람은 남았을 터인데 그 많던 후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재 중국의 요녕(遼寧)성, 길림(吉林)성, 흑룡강(黑龍江)성 등 동북3성 일대에는 고구려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이는 명칭이 상당수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요녕성 안산시 태안현에 있는 '고력방진(高力房鎭)'. 고구려방진으로 불리던 것을 중국 당국이 1940년대 후반 고력방진으로 개칭한 곳. '고구려'의 찬란했던 역사가 어떻게든 살아나는 것을 막으려는 중국측의 속셈이리라.
물어 물어 힘들게 찾아갔건만 실망이 컸다. 촌락을 이뤄 우리 조상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주민들 가운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고 풍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한족화 돼 있을 뿐이었다. 다만 동성동본 금혼의 풍습과 고씨 성만 남아 있는 상태. 고씨는 1천800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5%를 조금 넘는다.
무엇이든 고구려에 관한 사실을 말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니 인민대의원회 주석의 성이 고씨란다. 하지만 당사자인 고충량(高忠良)씨는 조선족의 습관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며 한사코 만나기를 거부했다. 자기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알고 온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득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자신은 고구려 후손임을 알고 있지만 전혀 내색 하지 않는단다.
고씨 항렬자가 스무자 정도 있는데 누가 무슨 목적에서 만든 것인지 전혀 모른다고 했다. 고씨족보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고구려에 관한 얘기는 금기시돼 있지만 한국에서 투자 또는 장사를 목적으로 찾아오면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씨들. 진(鎭) 청사에서 따라 나온 고구려의 후예(이름 밝히기를 꺼려함)는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를 해줬다. 과일을 사자 농약이 묻어 그냥 못먹는다며 인근 식당으로 가서 직접 씻어 주었다. 봉투가 찢어지기 쉽다며 봉투를 더 구해오기도 했다. 동족의 정이 새록새록 묻어났다.
장소를 바꿔 흑룡강성 하얼빈. 장수왕의 59세손임을 자처하는 고흥(高興·52) 하얼빈 방송통신대학 지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고교수는 고씨 가문의 족보와 그동안의 선조 추적 현황 등을 근거 자료로 제시하며 자신이 장수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고씨 가문의 족보에는 "우리 선조가 조선의 국왕이었고 이름은 '고련(高璉)'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고련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의 이름. 삼국사기에는 거련(巨璉)으로 기록돼 있다. 고구려 역사에서 '련'이라는 이름은 장수왕이 유일하다.
고 교수는 선친(고지겸, 지난1월 사망)과 함께 족보 추적을 통해 자신의 선대가 요녕성 요양에 살았으며 명나라 때 요양 동녕위 지휘사(遼陽 東寧衛 指揮使)를 세습했던 사실을 밝혀 냈다.
그는 요녕성에 있는 고구려인들의 집성촌 고력방진을 비롯, 중국에 흩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고구려연구소' 설립을 추진중이다. 그는 "중국 당국은 고구려 연구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며 한국에서 지원을 해주면 연구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원을 기대했다. 고씨는 자신의 두 아들도 한국에 유학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고씨의 변천사를 보면 고구려 유민의 과정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보장왕을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삼았다. 이후 요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면서 보장왕 후손들은 요나라 지방 요직을 차지했다. 현재 고씨 후손들은 이 당시의 추적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원나라 시대때는 몽골식 이름을 썼고 명나라 때는 동녕위에서 지휘사를 세습하는 등 중국의 요직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의 일이고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한반도로 넘어가고 중국 땅에 남았던 사람들은 한족이나 이민족으로 동화돼 갔다. 현재 중국에 있는 조선족은 조선말기 이후 만주지역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후손들이 있다. 횡성고씨가 주인공. 보장왕의 둘째 아들인 고인승(高仁勝)을 중시조로, 고주몽을 시조로 하는 횡성고씨는 하얼빈의 고흥씨 및 고력방진의 고씨들로 구성된 요양고씨들과 현재 왕래를 하며 조상찾기 작업을 강화하고 있다. 횡성고씨 종친회 고복길(원주시 단계동 488의5) 회장은 "요양고씨와 족보를 대조해보니 일족임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횡성고씨 종친회 연락처 033) 743-1641.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