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상황이 풀리지 않는 가운데, 세계 각국은 각자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영국=북해에서 하루 289만 배럴에 이르는 원유를 생산하는 산유국이다. 그 규모는 OPEC 3위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와 비슷한 것. 게다가 소비량이 하루 170만 배럴에 그치고 있다. 매일 120만 배럴이 남아 수출하는 원유 수출국.
따라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번 석유대란의 원인은 순전히 시위대의 수송 저지에 의한 수급 차질일 뿐이다. 때문에 정부의 고유가에 대한 인식이나 대응 등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판이할 수밖에 없다.
블레어 총리 정부는 이번 석유대란에도 정치적인 도박에 가까운 강경노선으로 일관했다. 유류세 인하 요구도 일축했다. 대책이라고 해야 경찰이 유조차를 호송하고 보호해 주겠다는게 전부.
영국은 유류 부가세를 ℓ당 1펜스만 낮춰도 연간 6억∼7억 파운드(1조2천억∼1조4천억원)의 세수 결함이 생기는데다 산유국이기 때문에 유가상승이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유가가 지나치게 상승할 경우 세계적인 인플레를 유발해 세계적 경기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 뿐이다.
◇미국=대선 때문에 고유가를 방치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기름값이 너무 오르면 성공적인 연착륙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경제를 경착륙시켜 클린턴 행정부의 업적을 모두 까먹고 선거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
때문에 10부제 운행 등 시민 불편을 초래하는 대책도 구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공급 관리에 매달리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도 이런 맥락에서 지난 6월 이후 OPEC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SPR(전략비축유) 방출 가능성을 흘리고 있다. SPR 방출은 1991년의 걸프전 당시에도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보온성 높은 건축자재 개발 △자동차 연비 향상 △풍력·태양력 등 대체 에너지 발굴 △에너지 절약 기술에 대한 세제 지원 등 중장기 대책에 대한 관심이 새삼 증폭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러시아=휘발유 등의 가격이 속등하고 있지만 정부는 느긋하다. 석유수출액이 오히려 엄청나게 증가, 만성적 세수부족을 완전히 해소시켜 주기 때문.
러시아는 매년 1억4천t 안팎의 석유를 수출해 왔지만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낮은 원유 가격 때문에 수출할수록 손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황이 반전한 것. 더욱이 지난 4월부터는 유가가 높을수록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탄력세 형태의 석유수출세제까지 실시하고 있다.
국가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 상반기에만 7천70만t의 원유를 수출해 119억 달러를 벌어 들였다. 작년 보다 양은 2.6%밖에 늘지 않았지만 액수는 132%나 증가했다. 이 기간 러시아 전체 수출에서 원유가 차지한 비중은 24.6%에 달했다.
물론 휘발유 소비 가격은 지난 한달 동안 15%나 올랐다. 때문에 석유제품 내수가격 속등을 마냥 방관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느긋하기만 하다. ◇프랑스=인플레가 발생하고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일고 있다. 더욱이 OPEC의 달러화 결제로 유로화까지 약세를 보임으로써 수입물가가 연 30% 상승하는 등 이중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이 다방면으로 전개되고 있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해서도 대대적 캠페인이 곧 벌어질 예정이다. 가정에서의 단열재 사용 확대, 열효율 높은 가전품 구입, 차량 과속 삼가, 단거리 주행 자제 등이 그것.
또 앞으로는 풍력 부문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개발에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 심각한 타격을 입은 프랑스는 그후 광범위한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주력했었다.
◇독일=기름값에 매겨져 있는 유류세와 환경세의 폐지·인하 문제가 첨예한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유가 중 세금 비율은 현재 67.7%. 지난 해부터는 환경세도 추가, 2003년까지 휘발유 ℓ당 0.3마르크가 추가 부과된다.
그러나 정부는 "환경세를 폐지하면 경제성장과 실업해소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할 것"이라며 "에너지 소비를 줄이도록 하기 위해서도 부과가 필요하다"고 반대하고 있다.
지난 1년 사이에 기름값이 약 25% 올라 차를 두고 걷거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오락용이던 롤러 블레이드 및 킥보드가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유로화 약세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 및 인플레를 우려해 긴축 기조를 엄격히 유지하고, 유가 상승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커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저소득층 난방 연료비 보조금 상향 조정 등 방안을 마련하는 것 등이 현재 정부가 하고 있는 대응이다.
◇비중동 산유국=인도네시아·멕시코 등은 고유가를 은근히 즐겼으나, 고유가 행진이 장기화될 경우 자국내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유가 안정에 협조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전체 수출물량의 20% 이상을 석유·가스가 차지하나, 석유화학 및 정유 산업의 미발달로 플라스틱, 화공약품, 윤활유, 정제유 등을 수입함으로써 고유가가 국내 물가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욱이 IMF 권고에 따라 다음달 1일부터는 석유 소비자 가격을 12% 인상키로 돼 있다.
여기에 금년도 물가 상승폭 5%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치안 혼란이 악화되면서 경제난 회복에 필수적인 외국자본 유치가 더욱 어려워지고, 내수시장 구매력 하락으로 경제 악화가 초래될 수도 있다. 1988년엔 석유 소비자 가격을 인상했다가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 32년간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수하르토 정권의 종말이 초래되기도 했었다.
멕시코도 입장이 비슷하며, 휘발유 등 정제유의 2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외신(연합)종합=朴鍾奉기자 paxkore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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