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창가에서…넉넉한 보름달 처럼

입력 2000-09-09 14:58:00

지난해 9월 이맘때. 31년 7개월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권희로씨가 가석방돼 어머니의 유골을 안고 어머니의 고향 부산으로 귀국했다. 그가 구마모토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때 그의 어머니는 시즈오카에서 1천km가 넘는 먼 길을 달려 매달 면회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그와 함께 부산으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희로야, 고향으로 가자. 고향이 가난한 곳이라면 한끼만 먹으면 어떠니. 생선 한 토막을 여럿이 나눠 먹으면 어때"라고 울먹이며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를 앞 사람 등에 붙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역으로 갑니다. 고향행 열차를 탑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바꿔탑니다. 집에 들어갑니다.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옵니다" 이쯤에서 절반쯤은 훌쩍이게 마련이다. 훈련소에서 땀이 범벅이 되도록 구르다가 맞는 '10분간 휴식시간'. 조교는 '나실제 괴로움…'이라는 노래를 시켜 울지않던 나머지 빡빡머리 선머슴아이들까지 기어이 훌쩍이게 만들었던 훈련병 시절이 있었다.

◈우울한 경제, 풍성한 한가위

고향. 꼭히 남북이산가족이 아니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도회지인들에게도 권희로씨의 고향이나 훈련병의 고향처럼 찾아 갈 고향이 있다. 그곳은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이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이며 '내 부엌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이웃이 있는 곳'이며 '발 벗고 같이 뛰놀며 흉없이 자라던 친구들이 있는 곳'이며 '순이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모두를 비쳐주는 달이 있는 곳이다. 고향은 가식의 탈을 벗은 내 지난날의 아이콘을 상징한다.

◈우리 마음속 소중한 곳

이제 사흘후면 추석이다. 하늘이 시리도록 파랗고 바람은 싫지 않다. 오곡이 익는 계절. 이 좋은 날에 휘영청 달까지 밝은 추석이다. 올 추석도 귀성객들로 도로마다 주차장을 이루면서 오늘 오후부터 또 한번 '귀성전쟁'이 벌어지겠지. 손에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새옷을 입고 고향을 향하는 길이면 평소 서너시간 고향길이 열 시간도 모자라는 먼 길이 되지만 그래도 기를 쓰고 고향을 찾는다. 찾을 고향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서러울까. 그래서 더욱 고향을 찾는지도 모른다.

고향은 보름달만큼이나 넉넉하다. 더러는 몹쓸 짓을 하거나 설령 말 못할 사정으로 야반도주했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난 후 찾는 고향은 그런 타향살이를 격려해주고 포근히 감싸준다. 객지에서 서럽게 보냈던 한을, 혹은 출세해서 찾아와 늘어놓는 떠세를 모두 한데 어우르고 포용해주는 것이 고향이다.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에 가자

보름달은 모두를 비춰 줄 것이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도, 부도난 기업가나 체불임금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에게도, 주식투자 실패로 기운을 잃은 주부에게도 보름달은 고루 비춰 줄 것이다. 대구의 굴지 그룹인 우방도 부도가 났다. 가뜩이나 어려운 대구에 IMF가 새로 찾아온 듯 도시 전체가 우울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인가. 고향을 찾지 못하는 그 우울한 시민들에게도 보름달은 훤히 비춰 줄 것이다.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또는 햇밤을 깎으며 도회지의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린 시절도 돌아가 이야기하면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을 듯 싶다. 장외에서 목청돋우는 야당과 이를 외면하는 여당의 입장을,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환자는 의사의 현실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고향에서의 추석이 될 것이다.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공직자는 공직자대로, 그냥 국민이면 국민대로 모두가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성묘길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 그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듯이 세월이 이만큼 흐른 지금에도 옛날로 돌아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또 들어주는 곳이 고향이다. 고향에 가자. 그리고 가면을 벗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이야기 해보자. 보름달이 모두를 훤히 비춰줄 것이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도 보름달은 빠짐없이 비춰 줄 것이다. 귀성대열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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