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 농군. 천규석(千圭奭·62)씨를 보면 '농군이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밭이랑처럼 구불구불 주름진 얼굴에 언뜻 나타나는 미소,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말투는 그가 일평생 지어온 무농약 채소처럼 사된(邪)것이 없어 보인다. 가끔씩 툭툭 던지는 신랄한 말들에는 고집이 배어있다.
거꾸로 사는 인생! 영원한 이상주의자! 천규석씨가 걸어온 인생길에서 느껴지는 단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태생. 일곱 남매의 장남. 아버지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중학교 2학년때 세상을 떠났다. 막내가 너댓살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대개의 농촌 아이들이 그러했듯 그도 들일을 하며 잔뼈가 굵어졌다.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어 왕복 4km의 학교길을 오가며 책읽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그저 면서기정도 됐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평범한 시골농군에다 자식 일곱을 줄줄이 거느린 아버지에게 재혼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당시 영산농고 2학년이던 그를 장가보내기로 했다. 아직 철부지였지만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두살 아래인 이웃마을 처녀와 중매결혼을 하게 됐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신접살림 2년 후 서울로 탈출(?)했다. 시인이나 시나리오작가의 꿈을 안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잡지 등에 글을 발표하며 문학도의 열정을 키워갔지만 차츰 현실의 벽을 실감케 됐다. 하늘처럼 생각했던 당대의 시인·소설가 교수들의 강의를 접하면서 문단의 위선과 복마전같은 풍토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렸다.
졸업 후 다시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갔다. 교수가 되겠다는 새 꿈을 안고서. 그때 미학과엔 시인 김지하를 비롯 반체제 운동을 펼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5·16 쿠데타, 6·3사태 등이 일어나면서 대학가엔 데모가 끊일 날이 없었고 그도 그 열기에 정신없이 휩쓸려 들어갔다.
데모로 지새우는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교수의 꿈도 버리기로 했다. 대학사회에서도 연줄과 '빽'이 큰 힘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두번째 꿈도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자신의 서울살이가 가짜인생처럼 여겨졌다. "도시생활이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나는 촌놈이니 농사지어 먹고 살며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모두가 괴나리봇짐싸고 도시로 도시로 떠나던 그 시절, 그는 거꾸로 농촌에 돌아왔다. 65년. 서울대를 졸업한 아들이 농군이 되겠다고 돌아오자 아버지의 실망은 컸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귀향에는 또한가지 이유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공부하러 대처로 떠나버린 남편대신 6년동안 혼자서 홀시아버지 수발과 집안살림을 도맡았던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는 농사를 짓는 한편,아버지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3년여동안 동아대 등 부산·경남지역 대학에 출강도 했다.
당시 창녕엔 농민단체인 경화회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경화회가 펴내는 책자의 편집장도 맡아 열심히 뛰었다. 60년대만 해도 대부분 농가에선 퇴비로 농사를 지었지만 70년대들어 화학비료가 본격 생산되면서 비료와 농약 사용이 크게 늘어났다. 그이 역시 고소득이 보장되는 양파채종 농사만큼은 농약을 사용했다. 양파채종농사는 농약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79년, 1남4녀의 자식들을 남겨놓고 아내가 암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농약치는 농사짓다 아내를 골병들어 죽게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간 줄곧 생각해 왔던 유기농(有機農)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비료와 농약없이는 농사를 못짓는 것으로 여기는 세태와는 거꾸로 가기로 작정했다. "자연의 이치대로 땅을 살리고 물을 살려야 우리도 살고 후손들도 살 것 아닌가" 유기농이야말로 공생(共生)의 생명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것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순환의 공생농'. 농약과 화학비료 대신 인분과 자급사료에 의한 가축분뇨, 풀거름 등을 사용하는 농법이 그가 주장하는 유기농이었다. 그것은 농산물 과잉생산에 따른 가격폭락과 시장교란을 막는 역할도 할 것이며, 농민과 도시민의 공생관계도 이뤄질 것이라고 여겼다.
고지식할 정도로 유기농법을 고집하던 그는 지난 88년 거처를 대구로 옮겼다. 장성한 자녀들이 하나둘 떠나가는데다 늙어가는 몸으로 혼자 농사짓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도시에서 유기농운동을 확장하기로 했다.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함께 지난 90년 한살림 대구공동체를 창립했다. 농촌의 유기농 생산물을 도시민에게 공급하는 회원제 공동체로 성삼경 영남대 교수(회장)와 녹색평론의 김종철교수 등이 동참했다.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 대구한살림은 창립회원 70명에서 지금은 730명 정도로 늘어났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전국 각처의 한살림단체중 가장 모범적인 단체로 손꼽힌다. 타지역 한살림 중엔 회원 수만명의 거대 단체도 있지만 그는 상업적 물량화를 거부, '작은 것들의 공존과 자생성, 자족성'을 원칙으로 지키고 있다. 그는 지난 95년, 오랜 꿈이자 이상이었던 공생농장을 마침내 실현시켰다. 회원들의 동참으로 창녕군 남지읍 수개리에 땅 8천여평을 확보, '공생농 두레농장'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함께 농사지어 그 소출을 도시인들과 나누어 소비하는 공동체가 그 이지요" 그의 뜻에 공감한 도시인들이 농군이 되겠노라고 찾아들었다. 소위 일류대학 졸업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은 30명정도.
비록 시인이나 시나리오작가의 꿈은 못이뤘지만 흙냄새, 땀냄새 풀풀나는 책도 여러권 펴냈다. '이 땅덩이와 밥상'(1993, 창작과 비평사),'땅사랑 당신사랑'(1996, 도서출판 명경),'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1999, 실천문학사).공생농 두레를 도농이 더불어 살아가는 마지막 생활공동체로 보고 희망을 걸고 있는 그는 때때로 경제성을 먼저 내세우는 일부 사람들과의 가치관 차이로 회의를 갖게되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내가 말짱 헛지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 때가 있어요" 인간적인 속내와 실망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천상 농군의 고집스러움은 여전하다. "내 능력과 나이를 생각할 때 이것 외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그는 "평생 자연을 해코지해온 우리가 죽을 때도 왜 자신을 자연에 돌려주지 않느냐"며 "나는 고향의 매화나무 밑에 봉분없이 묻혀 거름이나 되겠다"고 말했다.
全敬玉기자 sirius@imaeil.com
---'한살림 대구공동체'
'함께 사는 세상-생명의 공동체-'
대구시 남구 대명동 그린맨션 1단지 옆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은 '한살림대구공동체'(회장 성삼경 영남대 교수) 사무실에 있는 쌀, 감자, 마늘, 유자차, 산딸기주스 등 농산물과 농산물가공품에는 저마다 '생명'자와 '공동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한살림대구공동체는 지난 90년 천규석씨와 성삼경, 김종철교수 등 70여명에 의해 시작됐으며, 대구지역에 '건강한 밥상'을 위한 본격적인 유기농운동과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첨병역할을 해왔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퇴비와 무농약(일부 작물의 경우 저농약)의 유기농법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회원들에게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농민과 도시민을 건강한 먹을거리의 연결고리로 이어주는 작은 공동체인셈.
한살림대구공동체의 경우 가입비 5만원, 연회비 5만원이상을 내면 회원이 될 수 있다. 곡물, 채소, 계란, 과일, 농산물가공품과 일부 해산물 등을 철따라 주문공급하고 있다.
한살림공동체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원주를 비롯 서울, 청주, 수원, 대구, 부산, 마산 등지에 설치돼 있으며 대전지역 공동체도 곧 문을 열 예정이다. 한살림대구공동체 연락처 053)654-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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