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 고구려 석조 건축술과 문화적 수준을 이 장군총은 웅자로 대변한다.
1천500년이 지난 돌덩이들이 무너지거나 뒤틀려지지 않고 꼿꼿하게, 장엄하게 서 있다. 치밀한 계산과 과학, 경제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터. 탐험연구소장 윤명철씨는 "거대한 돌들을 모아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 인간적인 냄새가 나도록 만든 것은 공학·과학을 뛰어 넘어 우주를 끌어안을 수 있는 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2m 꼭대기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파여 있다. 기둥을 세운 흔적이다. 회색빛 와당, 기와들이 많이 발견됐단다. 기와를 얹은 건축물이 있었다는 증거다. 이건하(한서대 건축과) 교수는 가로 세로 각 7m, 높이 4.5m 정도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무엇을 하던 것일까. 광개토대왕비에는 '묘상입비(墓上立碑)'라는 귀절이 나온다. 묘지 위(앞)에 비석이나 건물을 세운다는 뜻이다. 당시의 장의(葬儀)풍속을 나타낸다. 장군총 위에 있던 건축물은 묘지를 관리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사당 역할을 했으리라.
중국 당국은 이곳을 국보급 문화재로 보호, 관리한다. 묘실을 공개는 하지만 사진 촬영은 금한다.
취재팀은 어렵게 촬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묘실 내부가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묘실은 시멘트로 마감 처리한 것처럼 매끈한 돌로 돼 있다. 관을 얹는 관대도 돌을 쪼개고 갈아 만들었다. 1천500년전 석재기술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할 수 있는 것일까.
장군총을 만들 즈음 고구려 계단식 석실묘 축조술은 최고조에 달한다. 하지만 지안(集安)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석실을 만들되 겉은 돌이 아닌 흙으로 덮은 봉토 석실묘가 등장함으로써 계단식 석실묘 축조술은 막을 내린다.묘실에는 두 개의 관대가 있으나 일찍 도굴 당해 어떤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묘실의 입구는 높이 7층 가운데 5층, 묘실은 3층에 위치한다. 지안의 고구려 전문가 김송학씨는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붉은 관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장군총은 1905년 처음 중국 학계에 보고됐다. 발견 당시 주민들은 장군같은 위용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장군총이라 이름 붙였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중국 학자들은 장수왕릉이라는 견해로 거의 통일된 상태. 무덤의 규모로 볼 때 왕릉임이 분명하고 건축술 등을 감안하면 장수왕 시절이 분명하다는 것.
처음에는 광개토대왕릉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태왕릉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愿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소서)이라는 명문이 나온 후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으로 굳어진 상태.
반면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했는데 수십년이 지난 뒤에 굳이 지안으로 무덤을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없지 않다. 국내 학자들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14년만인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고 다시 64년 뒤 사망한다. 재위기간이 78년이다. 평양 천도는 집안의 귀족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남방의 백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이뤄졌다. 당시로서는 일대 혁명적인 과업이었다. 그토록 공을 들인 평양을 두고 구세력들이 아직 발호하는 집안으로 옮겨 가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결혼하면 수의를 마련했으며 무덤 자리도 봐두었다는 풍습이 있었던 것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리라. 더욱이 부친의 능 곁에 묻혀 요절한 부친을 그리워하는 것도 어찌보면 효성이 지극한 장수왕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선왕을 그리워 하며 업적을 찬양하는 장수왕의 효성이 절절이 배어 있다.
장수왕은 전쟁보다 평화를 사랑했으며 평양으로 천도, 고구려를 농경사회로 진출시킨 군주로 통한다. 5세기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한 것은 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통치술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장군총의 이름도 장수왕릉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고구려 전문가 서길수 교수(서경대)는 "황제의 무덤은 '묘'자나 '총'자를 쓰지 않고 '릉'으로 부른다"며 "우리도 장수왕릉으로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 최정암기자, 사진 金泰亨기자
---13대 서천왕·14대 봉상왕
▨13대 서천왕·14대 봉상왕
제13대 서천왕(270~292년)은 중천왕의 아들. 주변국인 숙신을 공격, 고구려의 확실한 속국으로 만든다.
서천왕의 아들인 14대 봉상왕(292~300년)은 포악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위를 굳건히 한다는 이유로 작은 아버지를 죽였으며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인다며 대규모 공사를 강행, 원성을 샀다. 결국 신하들에게 쫓겨나는 비운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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