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말의 정치'

입력 2000-08-24 14:12:00

역대 정권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마디로 표현될 수 없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특징이나 이미지는 한마디로 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일의 정치'라고 한다면 전두환 대통령의 5공은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힘의 정치'였다고 볼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의 경우 밀려오는 민주주의 물결에 국정을 맡겨놓았다는 점에서 '물의 정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를 바로세운다며 사정칼을 휘둘렀으니 '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임기의 반을 남긴 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인상은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으나 '말의 정치'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신뢰의 상실

우선 국민의 눈에 현정권의 정치가 말의 정치로 비친 것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말바꾸기, 한건주의에 따른 정책혼선, 화려한 언어의 유희 등 때문이 아닐까. 우선 대통령 자신이 내각제개헌문제와 악법(惡法)불복종운동 등에 대해 말바꾸기를 했다. 장관들 역시 많은 말바꾸기가 있었음은 물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정책의 혼선으로 국민들에게 말많은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장관들의 한건주의식 발언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국민의 정부는 말이 많다고 국민이 느낄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부 국정운영 스타일이 과거 정부와 같은 목표지향형이 아니고 선진국형의 원칙지향형이기 때문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목표지향형에 익숙해 있던 국민의 눈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와 같은 원칙의 제시는 말이 많은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지적(知的)이고 논리적이다. 따라서 말이 많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또한 선진국 수준은 아니나 과거보다는 확대된 언론자유도 한 몫 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홍보를 중요시 한 것도 한 요인이다. 지난해 국정홍보처가 신설된 것은 물론 23개 정부부처 대변인중 48%인 11곳에 호남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의 정치, 홍보의 강조는 개혁의 실패나 사건의 발생에 근본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말로 때우는 눈가림식이 많다보니 자연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외면 당하는 부작용을 낳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국회에서 법안 날치기를 해놓고 "날치기가 아니다"고 하거나 금융노조마저 인정하는 관치금융을 놓고 '아니다'고 우기고 있다. 지난 4.13총선에서는 30당(當)20락(落)이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는 데도 여당에 있어서만은 돈선거나 관권선거가 없었다는 항변이다. 언어의 위장술(僞裝術)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말바꾸기로 된지 오래이고, 북한 잠수정의 침투는 출현으로, 간첩은 통일운동가, 공작금은 통일운동자금이 되어 있다. 이러니 말에서 믿음이 사라지게 됐다.언어의 폭력성 또한 문제이다. 통일이나 개혁 등에서 문제점을 제기할라치면 바로 반(反)통일적, 반개혁적 혹은 비(非)민주적이라는 소나기 비판을 면치 못한다. 햇볕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면 당장 "그럼 전쟁을 하자는 말인가"하는 어거지식 반론에 부닥치게 된다. 말의 정치라면 바로 대화와 연결되는 것이 상식인데 어찌 된 셈인지 우리의 말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없는 일방통행식의 '반(反)과 비(非)의 정치'가 되어버렸다.

##함께하는 개혁

이렇게 홍보만 강조한다면 국민은 이 정부는 업적을 통해 지지받으려 하기보다는 홍보를 통해 지지를 받으려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고 왜 공무원들이 이 정권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복지부동의 자세로 돌아서고 있는 지를 반성해야 한다. 정직하고 진실이 깃들어 있는 말은 힘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말은 효과가 없거나 있어도 일시적일 것이다. 아직은 임기의 중반이므로 국민의 정부는 절반의 성공인지 절반의 실패인지를 확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앞으로 지난 8.15때 밝힌 국정2기 목표대로 국민화합을 전제로 국민과 함께 개혁을 한다면 성공한 정부와 대통령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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