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인적 교류가 독 통일 원동력

입력 2000-08-18 14:51:00

한국에선 이산가족 방문이 이제 활성화될 전망이나, 독일의 통일과정이 급격하게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통일로 인한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분단 상태에서도 꾸준히 인적 교류가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동서독 주민간의 왕래가능성은 원칙적으로는 항상 열려 있었다. 1953년 11월 서방 3개국이 점령지역간 여권제도를 폐지한 이후, 동독인을 포함한 모든 독일인들은 서독 기본법에 따라서 독 내외로 자유로이 여행하는 것은 물론 거주지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은 상호 방문과 거주이전에 각종 제한을 가했다. 이 때문에 동서독간의 인적교류는 전적으로 동독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증감을 거듭했다.

1950년대에 동독 정부는 동독에 부모.형제를 두고 있는 서독인에 한해 1년에1회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최장 4주간 머물 수 있었으며 서독 주민이 서베를린을 통해 동베를린을 하루만 방문하거나 상업여행, 라이프치히 박람회 참관, 동독 공공기관의 초청에 의한 방문 등은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매년 평균 240만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다.

53년 6월 동독 민중봉기 이후 동독 주민의 서독 지역 방문 조건이 크게 완화돼매년 250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으며 이중 상당수가 서독에 정착하기도 했다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에는 동독인의 서독 방문이 거의 차단돼 1962년에는 겨우 2만7천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1961년 8월 동독 정부가 동독 주민의 서독 탈출 사태를 막기 위해 베를린장벽을 설치한 이후 서독인의 동독 방문도 매우 어려워져 연간 70만명 내외로 급감했다.1970년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린 이후 양독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72년 5월 동서독 교통조약이 체결됨으로써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매년 300만명 이상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다.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 역시 72년 교통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격히 늘어나 80년대 중반까지 매년 150만명 이상이 서독을 방문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이 500만명 이상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 제3국을 통한 탈출 행렬이 이어져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열기가 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서독 정부는 분단 40여년간 꾸준히 동독인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다. 분단 이후 통일 직전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은 500만명을 넘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간 사람도 50만명에 달했다.

이처럼 많은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하고 서독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서독 정부는 서독을 방문한 동독주민에게 1인당 100마르크의 환영금을 나눠주었으며 정착을 원하는 동독인에게는 정착 보조금을 지급하고 각종 사회보장 혜택과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

또한 서독은 동독 체제에 저항하다 투옥되거나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동독인들 중 약 3만4천명을 비밀 거래를 통해 서독으로 데려왔다. 서독은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조건으로 1977년까지는 1인당 4만마르크, 그 이후에는 1인당 9만6천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측에 제공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