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시장 새벽풍경

입력 2000-08-16 14:36:00

당신이 잠든 시간, 밤눈을 밝히고 어둠 속에서 삶을 일궈내는 사람들이 있다. 대구 칠성시장의 사람들, 그들은 멀리 동구 밖까지 마중나가 새로운 아침을 맞고, 떠나는 하루를 배웅한다. 캄캄한 새벽, 어둠 저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새벽 3시30분 칠성시장, 손님을 찾아 헤매는 택시가 간간이 오갈 뿐 널찍한 도로는 한산하다. 가운데 큰길을 경계로 한쪽엔 새벽 채소시장이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좌판을 펴는 상인들. 어둠 속에 숨겨뒀던 엄청난 양의 채소를 인도 위의 좌판으로 끌어내 차곡차곡 쌓는 사람, 부족한 잠을 하품으로 달래는 사람, 방금 도착한 채소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사람, 진작에 좌판 펴기를 끝내고 느긋이 앉아 파를 까는 아주머니…

백상호(42)씨는 희미한 백열등 아래 이미 좌판을 폈다. 인도는 물론이고 차도까지 널찍하게 자리잡고. 바로 옆 강씨의 좌판까지 최대한 넓게 자리를 잡는 버릇은 12년 채소장사 경험이 가르쳐 준 지혜이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플래스틱 소쿠리를 든 떠돌이 행상이 슬그머니 끼어 들기 마련. 떠돌이 행상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기껏 사다놓은 비닐을 슬쩍 빼써기 일쑤인데다, 조금씩 자기 영역을 넓혀 온다. 도매상인 백씨가 파는 채소는 계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여름 주종은 배추·상추·깻잎·오이 등이다.

첫 손님 등장. 새벽시장을 찾는 손님들은 대개 큰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거나 소매상인들. 이른 새벽, 감지 못한 머리가 무슨 흠일까. 모자를 푹 눌러 쓴 모습이 어쩐지 갑갑하다.

흥정 시작. 첫 손님을 놓치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 백씨의 얼굴엔 마뜩찮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금세 커다란 비닐 봉투를 열고 익숙한 솜씨로 배추를 담아 낸다. 새벽시장을 찾은 손님들이 연이어 등장하자 백씨의 손은 바빠지고, 어둠 속으로 배달을 나서는 아내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힌다.

백상호씨의 하루는 아내와 함께 새벽 3시에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방에 홀로 남겨진 아들 기혁이가 늘 마음에 걸린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새벽을 지키는 일이 초등학생에게는 견디기 힘든 두려움. 이 밤 아이는 어떤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까?

채소 장수들이 장악한 한쪽 인도의 건너편엔 좌판 주점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엷어지는 어둠을 아쉬워하는 젊은이들이 술잔을 주고 받는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인 사람답지 않게 눈이 말똥말똥한 사람,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늘어진 사람… 각양각색이다. 눈이 멀쩡한 한 넥타이에게 물었다.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하고 춤추다가 이제 막 도착했지용!" 눈동자는 멀쩡하지만 목소리는 한껏 풀어져 있었다.

난장이 플래스틱 의자에 몸뚱이를 걸친 나이 어린 여자. 걸터앉은 모양이 무척 위태롭다. 굽 높은 신발에 끈까지 풀어헤친 여자는 연신 까르르 웃어댄다. 좌판 주점의 안주는 멍게·해삼·소라가 주장. 한 접시에 5천원. 꽃시장 쪽으로 거슬러 올라 가서는 장어구이 전문 포장마차 구역이다.

새벽 5시를 넘기자 어둠이 멀찍이 물러났다. 밤을 새운 술꾼들도 하나 둘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나고, 좌판주점의 불은 차례로 꺼지고 있었다. 25년 경력의 좌판주점 주인 정씨 할머니(64)에게는 이 순간이 가장 힘들다. 좌판을 다 걷어낼 때까지 술잔 놓기를 거부하는 애주가들 때문. 몸서리쳐진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런 손님 덕분에 하룻밤에 3,4만원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밤새 불야성을 이루던 술집 좌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면, 채소 장수 백상호씨의 마음이 바빠진다. 길가에 펼쳐놓은 채소들을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야 할 시간. 언제든 시장 안으로 도망갈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으로 요령이 붙은 셈. 오늘도 어김없이 요란한 스피커 소리와 함께 모자를 쓴 행정 지도원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사람들의 출근이 시작되기 전에 혼잡한 도로는 질서를 되찾아야 하기 때문.

오래전 일이지만, 어물쩍대다가 워커 발에 배추와 상추가 짓밟혀 못쓰게 된 적도 있었다. 차도와 인도를 점령하는 짓을 이제 그만두고 싶지만 백씨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내일도 배추와 상추를 길바닥에 늘어놓고 팔아야 한다. 삶은 계속돼야 하고 기혁이는 자라야 하니까.

曺斗鎭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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