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8.13과 8.15의 사이에 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에 괜히 억지 의미부여를 해보려는 싱거운 수작이 아니다. 그것은 "10이 9와 11의 사이"라고 하는 말과는 다르다. '8.15'가 우리에게 단순한 날짜가 아닌 것처럼 '8.13'도 독일인에게는 단순한 날짜가 아니다.
'8.15'는 우리에겐 1945년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가리키는 역사적인 날짜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8.13'도 독일인에겐 역사적인 날짜이다. '8.13'이라 하면 그들은 곧 1961년을 생각하고 베를린을 떠올리고 장벽을 연상한다. 1961년 8월 13일은 공교롭게도 어제 8월 13일처럼 일요일이었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침전쟁을 도발한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었던 것처럼 그때까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동.서 베를린에 돌연 분단의 장벽을 구축한 61년 8월 13일도 일요일이었다.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2차대전 전승연합국의 분할점령계획은 45년에 이미 착수되었다. 그러한 '국토의 분할'이 본격적인 '민족의 분리'를 가져온 것은 한국에선 6.25 '남침전쟁'때부터요,독일에선 8.13 '장벽 구축'때부터였다. 6.25전쟁이전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북에서 남으로 넘어왔고 남에서도 북으로 넘어갔었다.
장벽이 구축되기전 베를린은 분단된 동.서독의 주민이 서로 찾아와 만날 수 있는 상봉의 도시, 양쪽으로 열린 만남의 장소였다. 1961년 8월 13일까지 자유도시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주민은 무려 400만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발'로 투표한 체제선택의 선거결과라고 서독은 선전했다. 그로해서 무엇보다도 동독의 젊은 노동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살아있는 한 도시에 장벽을 쌓아 두동강 내놓은 8.13의 폭거를 낳았다고 알려졌다.
해방의 1945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1948년의 8.15가 한반도의 분단사에 숙명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1961년의 8.13의 의미 역시 독일의 분단사에는 숙명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동방정책'을 입안, 추진해서 동.서 유럽의 긴장완화와 동.서독의 상호인정.교류.협력의 길을 터서 통일의 초석을 닦은 빌리 브란트는 500페이지가 넘는 말년의 예언적 자서전 첫 장을 61년 8월 13일이란 날짜를 적으며 시작하고 있다.
당시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독일사회민주당의 총리후보로 지명되어 노회한 아데나워 총리와 자웅을 겨루는 힘겨운 선거전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서독 각 도시를 유세하던 특별 전용침대차에서 그날 새벽 4시 30분쯤 장벽 구축의 긴급 전갈을 받고 급거 베를린에 돌아온다. 그래서 미.영.불 서방 3개국 정부 수반에게 장벽구축을 중단시키도록 긴급 구원요청을 타전하였으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은 경계선엔 당초 철조망부터 쳐지기 시작했다. 서베를린 시민과 시장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콘크리트장벽으로 점차 더욱 굳어지고 그 주변에는 지뢰를 묻어 사람의 근접조차 하지 못하게 막고 말았다. 철옹성이 된 분단의 장벽을 철거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머리로 철벽을 쳐서 뚫어보려는 우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분단된 도시의 시장으로선 해야 할 일도 아닐 뿐더러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분단의 장벽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내서 갈라진 동.서 베를린 시민이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보는 일이다. 그래서 동.서 베를린 시민이 서로 장벽의 경계선을 넘어 가족.친지를 만나볼 수 있는 통행증 발급을 위한 지루하고 어려운 교섭이 착수되었다. 시급하고 꼭 필요한 것은 분단의 장벽을 철거하는 일보다 분리된 시민을 다시 상봉케 하는 일이다. 그러한 베를린 시장시절의 경험이 브란트가 총리가 되면서 추진한 동방정책에도 그대로 계속 발전되었다. '국토분단의 극복'보다 '민족분리의 극복'이 우선한다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가 불가능한 경우 후자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브란트는 입증해 주었다.
남북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올해의 광복절은 우리에게 또다른 8.15의 뜻을 부각시켜 준다. 분단상황하에서도 상봉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국토분단의 극복보다 민족분리의 극복이 우리에게도 우선한다는 뜻을….
'8.13'과 '8.15'의 사이는 불과 이틀이지만 우리는 그 뜻을 깨닫는데 5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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