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이다. 수도는 서울에 있고 당연히 교육의 중심은 수도에 있다'
소규모 학교 통폐합이 한창이던 지난해, 경북 영양의 한 초등교사는 탄식했다. "3, 4학년 10여명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면서 음악, 미술, 체육까지 전 과목을 맡아야 했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통폐합된 학교 아이들은 달라졌다. 통학버스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큰 교실에서 많은 아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학원도 가야 하고…. "지친 표정이 역력해요. 놀이터로, 꿈을 키우는 곳으로 느껴지던 학교가 거대한 경기장으로 다가오는데 충격받지 않을 수 없지요"
교사들은 수도권에 비해 지방교육이 유일하게 갖고 있던 경쟁력이 소규모 학교일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학생 시절 풀과 나무, 별과 달을 보면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정서적 체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교육의 목표 한 가지 쯤은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학교 통폐합바람이 불고간 뒤 이도 저도 아닌 모양이 됐다. 보다 나은 학습여건, 경쟁을 통한 학습의욕 고취 등 통합에 따른 긍정적 효과는 신통찮은 반면 정서적 체험의 폭만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폐교는 지역 공동체의 균열을 불러왔다. 지역의 문화.체육 행사장이 흉물스런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뀌고 '돌아오는 농촌'에 대한 기대도 무너지고 있다. 경북에서 유일하게 면단위에 초등학교가 없는 영덕군 달산면의 경우 지난 95년 1천986명이던 인구가 현재 1천670명으로 줄었다. 면민들은 "40대가 가장 젊은 층"이라며 "자녀를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게 학교인데 초등학교도 없는 지역으로 젊은 사람들이 돌아올 리 있겠느냐"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학교(초.중.고)가 경북도내서만 지난 10년동안 460개. 전체의 30%에 달한다.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형설지공'의 고사가 학부모와 교사들의 입에서 흔하게 오르내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도 성공한 사례가 실제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도 투자 개념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투자가 많으면 그만큼 소출도 크다는 교육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우선되고 더 영향력이 큰 우리 현실에서는 경제력이 집중된 수도권의 교육이 지방에 비해 몇 단계 앞서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일과시간과 수업시간만 제대로 하면 되지요. 실력이 모자라든 뛰어나든 일과 후 시간까지 학교에서 책임진다는 건 모순입니다. 모두 가정에서 할 일 아닙니까" 지난 5월 열린 시.도 교육청 중등과장 회의에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불필요론을 역설한 교육부 간부의 이야기는 정부 스스로 이같은 차별적 현실을 인정한 셈이다.
대학입시에서는 이같은 경향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2002학년부터 도입되는 새 대입제도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방 학생들의 수도권 진학을 차단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새 대입제도의 대전제인 특기.적성 측면을 보자. 학교 내 특기.적성 교육조차 제대로 안 되는 농어촌 지역 학교에서, 사설 학원조차 변변히 없는 시골에서 과연 어떻게 특기와 적성을 기를 수 있을까.
수능시험은 어떤가. 갈수록 통합교과적이고 사회현실과 밀접한 방향으로 문제 출제의 축이 옮아가는데, 비행기도 지하철도 제대로 타 보지 못한 학생들은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상식과 현실을 어떻게 체득할 수 있을까.
갈수록 비중이 높아지는 면접과 구술, 논술고사는 또 어떤가. 사회.문화적 경험의 기회가 극히 적은 지방 학생들이 과연 모든 문화가 결집된 서울 학생들과 겨룰 수 있을까. 경북 한 여교사는 "교사인 우리조차 한달 가야 연극이나 음악감상은커녕 영화 한 편 보기도 힘든데 이런 교사들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사고 폭이 얼마나 좁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 경신고 김호원 교감은 "지방 학생들의 경우 새 대입제도를 쉽게 보다가는 원하는 대학 진학이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내년부터 구술 면접 시간을 1인당 30분으로 늘리고 반영비중을 높인다고 발표한 서울대 입시를 예로 들었다. 3~5명의 수험생을 모아놓고 2시간 동안 지망 학과와 관련된 자유토론을 시킬 경우 가뜩이나 발표력이 부족한데다 사투리까지 쓰는 지방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적 혜택과 지적 자극을 받으면서 성장한 서울 학생들과 과연 얼마만큼 논리적으로 다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대학의 고교 평가는 없는가. "전국 고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금까지 단 한명의 입학생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서울대의 발표나 "재학생의 수학능력 평가를 통해 전국 고교에 대한 분석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는 주요 사립 명문대의 고백이 이미 있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고교 평가는 있을 수 없다'는 공허한 발표만 되풀이한다.
대구의 한 고3교사는 "입시제도나 대학들의 전형방법이 갈수록 '촌놈은 지방대나 가라'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지방 국립대조차 서울지역 중위권 대학과 경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지방교육에 돌파구는 전혀 없는 것일까. 희망을 기대해선 안되는 것일까. 지역 교육계에서는 "아직 늦지 않다. 오히려 지금이 장기적인 지방교육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며 조심스럽게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가 지역 공동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방교육의 활로를 모색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경우 학교 재정이 여의치 않으면 학부모나 지역민들이 팔을 걷고 나서서 바자회를 열고, 모금운동을 한다. 교육 과정에는 학부모와 지역 인사들이 중요한 주체로 참여한다.
우리 역시 중앙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 통폐합은 학부모와 지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데도 그동안 우리는 모여서 토론하고 장.단점을 파악한 뒤 결정을 내리는 신중한 모습을 보인 기억이 거의 없다. 교육당국도 지방의 사정은 무시한 채 효율성과 행정 편의를 내세워 마구잡이로 학교통폐합을 추진할 문제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문화적 체험이 부족하다고 서울을 오갈 수는 없다. 자연 속에서, 농촌생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정서적 체험을 특화하면 되는 것이다. 경북도 교육청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교육이 중앙집중식이었다면 앞으로는 지방분권화로 바뀌어야 한다"며 "그 방법 역시 가장 작은 것부터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金在璥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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