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5)-군사도로와 옛 31번 국도

입력 2000-07-05 00:00:00

일월산 등줄과 목덜미를 휘감은 흉물. 비포장 군사도로다. 60년대 초반 산정상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뚫렸다. 산 동북단 초입을 거슬러 올라 일월의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에 버틴 레이더기지 검회색 건물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검은 구름 한무리가 바람에 지나면서 굵은 소낙비를 뿌린다. 뿌연 먼지 풀썩이던 비포장도로가 이내 물기에 젖어 질펀하다. 우리의 마음도 이내 질퍽인다.

길이 시원하게 뚫린 산은 산이 아니다. 영남 제일의 영산인 일월산이 산이 아니라니. 웃지 못할 일이다. 단지 경북에서 제일 높아 전파 송수신이 용이하다는 이유만으로 군사시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일자봉 정수리를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밀어내고 회칠과 콘크리트를 범벅한 바닥에 철골말뚝을 무참히 박았다. 주민들은 그때 산할아버지로 여겼던 호랑이의 울음이 보름이 계속됐다고 했다. 함부로 산을 망치는 인간들의 만용에 대한 노기였으리라.

일월산 범의 울부짖음이 골골을 타고 주민들을 불안케 했고 도로를 닦던 불도저 기사는 "공사를 미뤄달라"는 산신의 현몽을 무시해 살모사에게 물려 황천길을 갔다고 한다.

산을 자른 부분은 석축을 쌓고 위에 틈사이로 알뜰히 시멘트 붙임을 해 놓았다. 답답하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산중에 잘 닦인 길이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군사용 비포장길 끄트머리 일월재에서 만난 또다른 비포장도로. 범불사 가는 길목을 가르는 곳. 옛날 국도 31호선이다. 5년전 지금의 잘 포장된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근근이 이용된 온갖 애환을 간직한 길이다. 누구하나 국도라 알아주지도 여기지도 않는다. 모양도 그저 토끼길을 면한 좁고 꼬불꼬불 초라한 행색이다.

그러나 이 국도에는 국도31호선이라고 표시한 빛바랜 이정표가 남아있다. 마치 "나는 국도다"라 소리치는 것처럼. 영양군 일월면 용하리 아래댓티. 윗댓티 자연 부락을 스쳐 일월재를 넘어 봉화군 재산면 갈산과 소천면 임기로 이어지고 법전면 어지리 노룻골에서 국도35호선과 맞닥뜨린다.

청솔과 굴참나무의 녹음이 짙푸른 맹하(孟夏)이건만 길섶에 발목을 빠지게 하는 낙엽은 지난 늦가을 그 자리에 몸을 내린 그대로다. 사람이 좀처럼 다니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일월산에서 생산·제련한 광물을 옮기기 위해 일본군이 만든 것이다. 일월산 허리를 지나는 길만도 20여km. 수백명의 민초들이 징용으로 끌여와 길을 닦았다.

용화리 부분 대규모 탄광촌이 형성되고 수천여명의 주민이 징벌돼 장비라고는 삽과 괭이가 고작, 맨손이나 다름없이 길을 닦았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조달에 막바지 열을 올렸다. 민초들은 쉴새없이 작업장으로 내몰렸다.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된 노역이 1년이상 계속 됐다. 여름 폭우속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의 칼날같은 추위에도 작업은 이어졌다. 견디지 못한 민초들이 죽거나 도망하면 어디선가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채워졌다.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오미마을 김종구(54)씨는 이 징용에 동원돼 병을 얻은 후유증으로 오랜 고생끝에 돌아가신 선친 생각에 지근한 이 도로를 단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한이 서린 도로를 어떻게 다닐수 있겠습니까"그 한은 이토록 모질게 대물림 한다. 일월면 용화리 제련소와 봉화군 재산면 산막리 산막광산, 일월광산을 거쳐 장군광업소를 연결하는 민족수탈의 도로. 일제 착취의 상징이다.

일월산 곳곳에서 생산된 구리와 납 등 군소물자용 광물을 실은 차들은 이도로를 달려 임기역으로 향했다.

민초들은 이 도로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해방을 맞고 숱한 민초들이 이 도로에 한을 토했다. 윗대티마을을 조금 지나 도로 한쪽이 움푹 패였다. 웬만한 차들은 못다닐 정도다.

당시를 회고한 김기환(78·일월면 용화리)씨는 "봉화로 넘어가던 사람들이 홧김에 삽과 괭이로 도로를 파 헤친것"이란다. 이들의 한이 한웅큼이나 묻혀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날까지 복구조차 안된채 그대로다.

해방이후 한때 이도로는 쓸모없는 길이 돼 버렸다. 영양사람들도 봉화에 가기위해 안동으로 돌아가거나 80년 중반에 뚫린 지방도 918호선을 이용했다. 국도였으나 험하디 험한데다 화석처럼 굳어 가슴에 남은 한 때문에 주민들은 이길을 가지 않았다. 차츰 영양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그러다 60년대 들어 일월산과 영양지역 국유림에 대대적인 산판이 활기를 띠면서 옛국도 31호선은 다시 분주해 졌다.

한국전쟁판에서 흘러나온 소위 '제무시'(GMC사 트럭)가 올곧아 미끈한 육송(陸松)을 싣고 이도로를 쉴새없이 넘나들었다. 나무는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을 지나 울진, 봉화, 영양 접경지인 봉화군 소천면 옥방마을로 옮겨졌다. 다시 분천역으로 실려 가 강원도 지방 광산갱목이 됐다. 또 전국 각처의 고래등 같다는 한옥집의 동량(棟樑)이 되기도 했다.

송진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부산물도 이길을 따라 반출됐다. 당시 이곳에서 생산된 임산물은 경상북도 전체의 70%를 차지할 정도였다.

30년간 산판일을 해온 김일수(66·영양읍 서부리)씨는 "골골이 손으로 길을 고치고 GMC차를 이용한 목재반출이 끊이질 않았다"고 반추했다. 일제때와는 길의 역할이 달랐다. 모조리 빼앗기는 길이 아니라 나무를 내주고 알토란 같은 재물을 되가져다 주는 길이 된 것이다. 대대적인 벌목이었다. 덕분에 (?) 일월산의 동(영양)쪽과 서(봉화)쪽이 영판 다른 모습이다. 영양의 일월산은 소나무, 참나무 등 우량목이 원시림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잡목으로 우거져 볼품없는 민둥산이다.

일월재를 넘어선 봉화의 일월산은 원시림 그대로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비포장국도를 뒤덮어 햇볕을 가릴 정도다. 어찌 같은 산이건만 이토록 풍광이 다를수 있을까. 그 절반의 이유는 산속에는 생기지 않아야 할 길 때문이다.

5년전 일월자락에 넓다란 터널은 두개나 뚫은 아스팔트 국도가 새로 나면서 일월산 옛국도 31호선은 또다시 조용함을 맞고 있다. 도로는 무심하다. 엄청난 일제 착취의 아픔도, 나무장이들의 요란함도 길섶의 낙엽속에 모두 묻혔다. 지금은 봉화 재산에서 일월산 정상 레이더기지로 출근하는 군장교들의 출퇴근길, 황씨부인당을 찾았던 무속인들이 범불사 굿당으로 향하는 그다지 쓰임새 없는 한적한 길로 남았다.

이 길 구비구비마다 베인 민초들의 거친 숨결과 토해낸 아픔, 애환을 뭍사람들은 상상이라도 할수 있을까. 길끝 봉화 재산면과 이어지는 새국도에서 마주친 GMC트럭이야 그때 기억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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