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도리 집에 도착하자 일행은 우선 10대 다카도리와 11대 세이잔 여사가 잠든 묘소를 찾았다. 묘소는 일본서는 처음 보는 조선식 봉분이다.
조선식 묘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후쿠오카에서 재일교포를 초빙해서 터를 잡았단다. 나중에 한국에서 손님들이 와서 보고 풍수가 잡은 것보다 묘자리를 잘 잡았다고 그러더란다. 얼른 보기에도 남향에 뒤로 산을 지고 앞 개울을 마주한 품이 아늑해 보인다.
묘소에서 몇발자국 내려서 집 후원 가까이 오니 특이한 풍경이 눈에 띈다. 바로 '카라우슈'라는 물방아다. 사시장철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끌어다 도석(陶石)을 빻도록 만든 장치인데 우리네 물레방아와는 사뭇 다르다.
모양새가 마치 디딜방아와 흡사한데 디딜방아의 발딛는 부분에 홈을 파서 물을 받도록 했다. 물이 한 홈통 차면 방아는 저절로 번쩍 들리며 물은 쏟아진다. 순간적으로 방아는 내리찍히며 도자기 돌들을 빻도록 만들어져있다. 두기(基)의 방아가 일년내내 한시도 쉬지않고 쿵덕 쿵덕 절구질을 한단다.
"옛날부터 다카도리 가문은 흙들을 이렇게 빻아서 썼답니다. 도석을 한 절구 넣고 24시간을 빻아 한달 정도 지나면 고운 흙이 되죠. 그러나 그 양은 절구 하나에서 두어말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아 많은 작품을 할 수가 없답니다. 때문에 다카도리 가문에서는 도자기를 배우기 전에 흙에 대한 소중함과 경외심을 배워야 한답니다"
카라우슈 하나만 봐도 이 집안의 가풍이 쉽게 상상된다. 소량고품격(小量高品格). 한줌의 흙도 내 살점처럼 귀하게 여기며 한 점의 그릇을 만드는데 혼을 불어넣는데 어떻게 명물(名物)들이 탄생하지 않을 것인가.
물방아를 지나 목가적인 나무다리를 건너 몇 걸음 더 내려서면 만든지 30년이 지났다는 오름가마 두기가 나란히 앉혀있다. 우리의 전통가마와는 달리 내부를 내화벽돌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두텁게 얹었다.
"초대 다카도리는 지금과 같은 가마를 쓰지 않았다고 해요. 연방형 가마라고 해서 마치 대나무를 쪼개 엎어 논 것과 같은 가마 형태였죠. 2대때부터 일본 환경에 맞춰 지금과 같은 가마를 썼다고 그래요"
조선 민족은 그만큼 빨리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고 일본속으로 동화되어갔다는 증거가 아닐까. 가마 아궁이 위에는 소줏잔 두 개와 먼지 뒤집어 쓴 쟁반이 놓여 있다.
"일본도 가마 불지피기 전에는 제(祭)를 올리는 풍습이 있나보죠."
"물론이죠. 가마불은 잘해야 한해 두세번 지피는데 1천300도의 불이 어떤 조화를 부릴지 알 수 없잖아요. 나약한 인간이 제라도 올려 위안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어디나 같지 않을까요"
도자기는 여느 예술과 달리 인간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 해왔지만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흙과 물, 불로 만드는 이 도자기는 인간이 단지 한 순간 자연으로부터 빌려 쓸 뿐이 아니던가.
가마를 돌아내려와 다실 앞으로 가자 13대 다카도리 에이사크(高取榮作)와 그의 어머니가 문앞에서 정중하게 맞아 주었다. 13대 다카도리는 머리를 삭발하고 승려복을 입고 있다. 그에게서는 종교적 위엄보다 천진한 눈빛과 꾸밈없는 미소가 있어 첫 눈에 인간적 매력이 흠뻑 묻어난다.
찻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자 다카도리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명함을 건네며 십년지기 인양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 모습이 마치 소녀와 같아 덩달아 기분이 밝아진다.
지루하게 소개 인사가 건네질 동안 13대 다카도리는 다구함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정좌하고 찻상쪽의 일행 한사람 한사람을 지그시 응시하며 차그릇을 정성들여 닦아낸다. 그 때 옆에 앉았던 가이드는 차그릇을 준비하는 동안 주인은 손님을 쳐다보며 차를 준비하고 손님은 그 눈길에 맞추어 응대하는 것이 예의라고 살짝 귀띔해준다.
다식이 끝나고 차가 준비되어 가져오자 찻상머리로 자리한 13대 다카도리가 반질 반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겸연쩍어 한다.
"차(茶)수행 중이어서 행색이 이렇습니다"
그는 3년 전부터 다이토쿠지(大德寺) 다승으로부터 차수업을 받고 있다. 그릇을 빚기 전에 차의 마음을 알아야 옳은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우라센케이가의 권유에 의해서 시작했다고 가이드는 덧붙인다.
"차수행을 한지가 이미 꽤 오래 된 것으로 아는데 이젠 마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가이드가 웃으며 툭 던져본다.
"어디 차수행에 끝이 있습니까.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고 해맑게 웃으며 마시고 있는 차그릇에 대해 소개를 한다.
"지금 마시는 차그릇은 아버지가 17년 전에 만든 그릇으로 우라센케이 엔슈보리(종주)가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그릇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기에 오늘 처음 꺼내 봤습니다"
차를 마시던 가이드는 그 소리에 다시 정좌를 하며 그릇을 살피며 수차례 환대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야기인즉 지금 다카도리가에서 하고 있는 차대접은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접대라는 것이다. 가보와 다름없는 찻그릇을 함(函)에서 처음 꺼내 당주(堂主)가 직접 차를 대접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엔슈보리가 문양을 넣었다는 차그릇은 철사(鐵砂)로 풍죽이 그려져 있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대나무가 가슴에서 찬바람이 스쳐 지날 것 같은 기품을 지녔다. 또 하나의 그릇은 다승의 일상을 유유자적하게 시문했는데 풍만감에 기분이 저절로 느슨해질 지경이다. 이 그릇의 가치를 돈으로 따진다면 얼마쯤 하는지 가이드 한테 살짝 물어보니 굳이 따진다면 수억원대는 되지 않겠냐며 웃는다.
"13대 다카도리는 도자기를 어떻게 배웠나요"
"세이잔 할머니가 도업 중흥에 그만큼 집착했 듯이 애초 나는 도자기를 위해 태어난 운명일 수밖에 없었어요. 흙을 언제부터 만진지는 기억도 없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하루종일 물레앞에 붙어앉아 있어야만 했어요. 그 때 여름이면 바닷가로 가족들이랑 놀러가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으니까요"
지금 13대 다카도리의 나이 40세. 겸손인지 사실인지 아직 그의 그릇은 세상에 내놓을 만큼 완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그는 지난해 도쿄 미쓰코시(三越)백화점에서 습명전을 열어 다도계와 도예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수양에 충실하며 시대를 뛰어넘는 그릇을 가슴속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다도 문화를 이끌어가는 우라센케이의 지정 다구납품집이라는 명예는 역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들은 기교의 차그릇보다는 혼이 배인 차그릇, 생명이 있는 차그릇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지정한 집이 언제나 정상임을 확인해주길 바라고 그 기대에 어긋날 때 370년의 전통도 취소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 두 개의 명품, 한 두 대의 걸출한 장인이 아닌 대를 이은 엔슈 다카도리. 그 위대함은 조선 도공 400년 생명력의 표현이자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또다른 승리이기도 하다.
-글·사진 전충진기자cjjeon@imaeil.com
---13대 다카도리
-아버님, 12대 다카도리도 뵙고 싶었는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으신가요.
▲노인병을 앓고 있어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지금은 상태가 매우 좋지않습니다. 간혹 병세가 호전될 때면 늘 한국엘 한번 데려다 달라고 조릅니다. 한국을 건너가서 선조의 땅, 그 흙으로 그릇을 한번 빚을 수 있다면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버릇처럼 하시곤 해요.
- 쾌차해서 다시 한국을 한번 방문할 수 있었으면…. 과거 아버님은 선조 고향 고령도 방문하고 했는데 13대는 앞으로 고향을 찾을 생각은 없는지.
▲아직 아버님이 와병중이고 습명받은지도 얼마되지않아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선조의 고향도 방문할까 합니다.
-한국 경주에 다카도리 기념관을 계획한 걸로 아는데…
▲할머니가 애착을 많이 가졌셨죠. 마치 경주를 가면 집안에 든 것 같이 편안하다고 하시곤 했어요. 지금은 경주의 기념비도 이천으로 옮겨졌지요. 관리를 할 수 없어 이곳에서 도자기를 배운 한국 제자가 돌보고 있답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전시회 계획은.
▲이천도자엑스포 초청을 받아놓고 있습니다만 가능하다면 선조의 고향 근처에서도 전시회를 열어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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