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기계·안강 전투

입력 2000-06-30 14:08:00

하늘이 조금씩 높아가던 9월 초순경. 기계 북방의 어느 무명고지. '드르륵 드르륵…' 인민군의 요란한 기관총 소리와 함께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병사들이 엎드린 밭둑에 갑자기 '우두두둑'하고 대추가 우박 떨어지듯 쏟아졌다.

적당하게 익은 대추. 병사들은 3일째 굶고 있었다. 순간 생사를 건 교전도 잊어버리고 병사들은 너나 가릴것 없이 대추 주워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한 병사는 나무에 기어 올라가 대추를 따려다 집중사격을 받고 떨어졌다.

굶주림의 고통이 죽음의 공포보다 앞섰던 것인가. 장병들은 인민군이 선사한 때아닌 특식(?)으로 잠시나마 허기를 달랜 셈이었다. 이 전투에서 대대장 정 진 소령은 북에서 헤어진 조카를 만나는 기쁨까지 덤으로 얻었다. 인민군 766 유격부대원으로 참전했던 조카가 상대 국군 부대장이 숙부인 것을 알고 투항해 온 것. 전쟁도 핏줄의 정을 끊지는 못했다.

수도사단 17연대 학도병으로 어래산 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이종달(67·안강읍 육통1리·당시 안강중 3년)씨. 그도 굴곡진 6·25의 상흔을 지니고 있다. 이씨는 8월 28일 안강 제일초등학교에서 5일간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투입됐다.

기계·안강간 도로변인 어래산 동쪽 끝 고지. 겨울이면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오르내리던 마을 뒷산에서 동족간의 살육이라니…. 이씨는 어래산 전투에 학도병만 해도 100여명이 투입됐는데 생존자가 십수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참전한지 3일만에 '해방동무'가 됐습니다. 당시 인민군들은 국군 포로를 그렇게 불렀지요"

인민군 12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비학산으로 끌려간 이씨는 안강이 고향인 30대 중반의 정중좌란 인민군 부연대장을 만났다. 그는 일제때 부모를 따라 서간도로 이주, 독립투쟁에 투신한 중국 팔로군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강 지리에 밝았고 같은 고향이란 이유로 정중좌의 안내원 역할을 하던 이씨는 12일만에 인민군 진영을 탈출했다.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던 마을 노인집에서 일주일 동안을 숨어 지냈지요. 그러다 북진하는 국군 수색대대에 다시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포로가 된 인민군 병사들과 함께 경주의 수도사단 사령부로 끌려간 이씨는 국군 장병들의 폭언과 위협에 어린 마음이 너무도 착잡했다고 전한다. 그후 겨우 낙오된 학도병으로 증명이 되어 부산의 육군본부로 후송됐다는 것.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집을 지척에 두고 북쪽으로 끌려갈까 두려워 훌쩍거리던 나를 따라 같이 울먹이던 인민군 경계병의 모습이…. 앳된 얼굴의 그 인민군 병사도 고향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기계·안강전투는 기계~안강~경주 기동로를 따라 부산으로 진출하려던 인민군 12사단 및 766부대와 이에 맞선 국군 수도사단과 포항지구 전투사령부 사이에 벌어진 공방전이다. 안강을 빼앗기면 낙동강방어선이 절단되고 포항과 영천·대구로 이어지는 국군의 횡적 보급로가 차단되어 경주가 당장 위험한 지경이었다.

8월 13일 전선을 방문한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은 기계탈환을 준비하고 있던 수도사단 18연대장 임충식 대령에게 한통의 밀서를 건냈다. '귀 연대의 역습에 안강과 기계의 운명이 걸렸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라.' 기계를 점령당한데 따른 동부전선의 위기감이 그토록 절박했다.

기계·안강전투는 '초급장교의 무덤'이라고 알려질 만큼 피아간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치열했다. 26일 국군 수도사단이 비학산에 대한 무리한 공격을 시도할 때부터 그런 소문이 나돌았다.

17연대의 경우 하루 전사자가 최고 300명에 달했는데, 주로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소위·중위급 장교 50여명이 거의 죽거나 부상을 입은데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상사와 중사까지 소대장으로 현지 임관시켜 올려보냈지만, 이들도 모두 희생됐다. 전사(戰史)는 "후방에서 기계·안강의 수도사단에 배속되는 초급장교들은 모두 유서를 써놓고 일선 중대로 나갈 정도로 비장한 각오를 해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9월 중순이후 국군의 북진과 함께 돌아온 황재복(84·당시 안강부읍장)씨는 그때의 피해 상황을 묻자 50년전의 체취가 지금도 코에 밴 듯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

"2천명의 주민들이 매일 동원되어 20여일간 시체 제거작업을 했지요. 공설운동장(현재 읍민회관)과 칠평천변에서 무더기 화장을 했습니다. 시체는 곳곳에 널렸는데, 파리떼는 들끓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지요" 촌로들은 그해 가을은 풍년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주인잃은 밭에도 콩꼬투리가 누렇게 익었고, 논에는 벼이삭이 잘도 영글었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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