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철거된 구 한일극장은 피란지 대구의 문화중심이었다. 문화극장으로 불리다 전쟁발발로 대구국립극장으로 명칭이 바뀐 한일극장에는 강연회와 음악.무용공연이 많이 열렸다.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4월 공군종군작가단(창공구락부·단장 마해송)에 소속된 조지훈 최인욱 등이 서울 여의도 공군기지에 가서 폭격기 출격과 조종사들의 전공을 취재하고 대구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대구국립극장에서 종군보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공군순보'와 일간지 등에 종군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최인욱이 각색한 '날개 춘향전'이 같은 무대에 올랐는데 영화배우 황정순 최은희 등 연기자들이 출연해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당시 문인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박두진 유주현 등은 정찰기를 타고 전선을 돌아보기도 했으며, 조지훈 박목월 등은 공군 군가를 작사해 널리 보급해 공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특히 어린이날 기념행사의 하나로 공군의 협조를 얻어 전단 수 만장을 공중살포했다. 이로 인해 후일 대구에서 전국 최초로 '어린이 헌장비'가 세워지는 계기가 됐다.
육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된 것은 1951년 5월. 대구 아담다방에서 정비석 구상 장덕조 최태응 박영준 박인환 등이 모여 작가단을 결성했다. 최독견이 단장을 맡았다. 이 모임에는 계속적으로 문인들이 신입회원으로 등록했는데 장만영 김동진 김영수 윤석중 유치환 손소희 하대응 이호우 등도 참여했다. 종군작품을 당시 신문과 잡지에 게재하고, 기관지를 발간했으며 종군보고회도 갖는 등 작가단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많은 문인들이 일선 종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 작가단의 활동은 52년 4월 종군작가단 기관지 '전선문학' 창간으로 이어졌다.
전쟁중이라해도 모두들 바짝 긴장하고만 있지 않았다. 해가 지면 한 잔 술 생각이 난 피란지 문인들의 발걸음은 향촌동으로 쏠렸다. 하나둘씩 다방 '금붕어'나 '호수'와 '백록'으로 찾아들었고, 서로 의기투합하면 삼삼오오 주점으로 밀려가 한 잔의 술로 전쟁통의 불안과 에트랑제의 허허로움을 달랬다. 당시 향촌동을 주름잡던 '어깨'들도 문화예술인들에겐 관대했는데 때로는 술을 사는 여유도 보였다고 한다. 아리따운 다방마담, 여급과의 숨겨진 로맨스도 들려오고, 몇몇 문화예술인들의 기행(奇行)도 입에 오르내렸다.
56년 국방부 정훈국이 발행한 '정훈대계'에 따르면 육군종군작가단의 업적은 일선 종군 220회, 종군연일수 924일, 종군보고강연회 8회, 문학·음악의 밤 개최 14회, 문인극 공연 2회, 지방순회강연 2회, 군가 작사 수십 편 등으로 나타났다. 이 업적의 대부분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한국전 당시 대구·경북은 비록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徐琮澈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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