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12월,평소 존경하던 고향어른인 이동영 봉명그룹회장님이 타계하셨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으로 있던차 우연히 고인의 한 친구분의 조사(弔詞)를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지팡이에 의지한 허름한 옷차림의 한 노인이 "나도 한마디 해야 한다'며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듯이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 영감쟁이 백수를 할 줄 알았는데 와 일찍 죽었노? 이 영감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자신은 자격이 없다며 사양하다가 박대통령에게 호통을 맞았고 낙선한 상대 후보의 선거빚을 남몰래 갚아주기도 하였는데…. 또 내 자식놈이 사업에 실패했을 때 자기 아들에게 망한 회사를 인수케 하여 빚을 청산케 하고 못난 내 자식놈에게 회사를 되돌려 주게한 영감인데, 와 이런 영감쟁이가 일찍 죽노…'
노인의 절절한 추도사가 이어지자 장내는 한결 숙연해졌고 고인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한다. 울면서 탄식한 그 노인은 바로 공화당시절 당 정책의장을 지낸 백남억씨였다.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 이따금씩 고 이회장님의 삶을 떠올려본다. 어린 시절, 가난한 동네 이웃들이 그분의 광산에서 일하며 보리고개의 시름을 놓던 모습,자신의 땅에 관공서를 짓게 했고, 사람은 배워야 한다며 고향에 남녀고등학교를 세웠지만 자신은 소달구지로 석탄을 나르는 일꾼에 불과하다며 국회의원 된 것도 부끄러워했던 겸손함이 생각난다. 또 어떤 신문사로부터 자서전을 연재하자는 제의를 몇 번이나 받았지만 거절했던, '자기 없음'을 보여준 모습이 기억난다.
지난 4·13총선을 며칠 앞두고 고향가는 길에 고인이 잠들어 있는 문창고등학교 앞을 지나게 됐다. 어떤 출마자의 홍보차량으로부터 자기만이 자격있노라며 확성기로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뽐내지 않아도 천리를 가는 난향(蘭香)과 같은 삶과, 비단에 명시절귀(名詩絶句)로 쓰인 그어떤 만사(輓詞)보다 현우(賢友)를 그리워하는 진심어린 조사를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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