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입력 2000-04-11 14:03:00

"20세기 마지막 10년동안 세계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경험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패배와 붕괴는 서반구의 강국인 미국이 유일하고도 사실상 최초의 세계 강국으로 급속히 부상하는 역사적 도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하지만 유라시아는 여전히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유라시아는 세계 일등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다."

70년대말 미국 카터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맡았던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72)는 그의 저서 'The Grand Chessboard'(97년)에서 유라시아의 특정 국가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나아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삼인출판에서 '거대한 체스판'(김명섭 한신대교수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온 이 책에서 그는 21세기 미국의 세계 전략과 유라시아와의 상관관계를 분석, 미국의 대외정책수립의 전형을 제시했다.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 확대를 위해 강경 노선을 고수한 대표적 인물인 브레진스키가 유라시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미국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으로서 과거 어떤 제국도 누린 적 없고, 현재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하는 '세계 일등 지위'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미국의 오만과 자신감, 한편으로 치밀함에 대해서 독자들은 강한 거부감마저 들지 모른다. 브레진스키는 과거 제국 체제에서 쓰였던 속방과 조공국, 보호국과 식민지 따위의 용어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오늘날 미국의 궤도 안에 있는 국가들을 묘사하는데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만 볼 수 없다"며 이를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는 향후 미국에 중요한 것은 거대 대륙 유라시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의 관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먼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럽의 정치적 통합이 반미적 성격으로 촉진되는 경우다. 다음으로 중국과 러시아, 이슬람 진영이 미국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연대하거나 일본이 다시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연상시키는 반미적 아시아주의에 기울어지는 상황이다. 만일 이같은 상황이 동시에 발생한다면 현재 미국이 누리고 있는 세계 일등적 지위는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우려한다. 따라서 유라시아 대륙은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놓고 여전히 게임을 벌여야 하는 '체스판'과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유라시아 서쪽의 유럽은 아직까지도 세계적인 정치·경제적 힘을 보유하고 있고, 유라시아 동쪽인 아시아는 최근 경제적 성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패권적이고 적대적인 유라시아 강국의 부상을 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미국이 세계 일등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정치적 거중 조정자로서의 자리를 확보하는 가운데 유라시아가 안정적인 대륙적 균형을 창출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게 그의 결론이다. 특히 유라시아의 한 귀퉁이에 있는 나라로 희미하게 다뤄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그의 언급 부분은 반미 운동의 연장선에서 읽히고 토론해볼만한 대목이다.

徐琮澈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