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평상심으로 돌아가자

입력 2000-04-06 00:00:00

우리의 삶은 바야흐로 비인간화로 치닫는 '소유(所有) 양식'이 지배하는 느낌이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본래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존재(存在) 양식'은 희석되고 밀리는 형국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라는 삶의 두 가지 양태를 테니슨과 바쇼의 시에서 추출, 소유 양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 준 바 있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는 테니슨의 시의 화자는 꽃을 소유하려 한다. 하지만 꽃은 그 결과 죽어버린다. 시인이 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해 버린 셈이다.

바쇼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그는 '가만히 살펴 보니/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라는 하이쿠를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꽃을 꺾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을 대는 일조차 삼갔다. 다만 바라보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만 했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인간에 중심을 둔 사회'와 '사물에 중심을 둔 사회'로 변별되기도 한다. 프롬에 따르면 소유를 지향하면 돈.명예.권력에 대한 탐욕이 삶의 지배적 주제가 된다. 반대로 존재 양식은 소유하지 않고,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바라보며 즐거워 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세계와 하나 되기에 이른다. 이같이 존재 양식은 부단한 자기발전과 자기창조에로 나아가지만, 소유 양식은 충족 또는 만족이면서 동시에 자기고정이어서 변화.모험.실험 등을 이반(離反)한다.

오늘날 우리의 고뇌는 어디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삶의 소유 양식에로의 기울어짐이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프롬의 주장대로, 그같은 고뇌를 벗어나려면 소유 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소유는 상실을 본질로 지녀

'소유'는 '상실'을 이미 그 본질로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오직 소유가 목적이며, 그것을 위한 생산 활동이 수단 자체가 되기 때문에 휴머니즘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병풍(兵風).세풍(稅風), 지역감정 부추기기, 전과(前科) 들춰내기와 들춰짐 등으로 얼룩진 지금 우리의 정치 풍토는 바로 그 소유 양식의 어둠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상처와 흠집내기, 정권 창출 욕망과 불신감의 팽배, 지역 이기주의, 돈 바람, 유권자들의 갖가지 요구, 현실성이 희박한 공약들, 낙선 운동과 철면피들(?)의 행진, 모래성과 같은 정당 등 그 치부를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번 총선 정국은 참담한 느낌들을 안겨 준다. 한 철학자가 오죽하면 정치가들을 '도적이 아니면 사기꾼'이라고 폄하했겠는가.

우리의 정치 풍토는 새 세기를 맞아도 되레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이나 지역 감정, '소유'를 지향하는 패거리 짓기가 고질병처럼 번지고, 지역이기주의나 권력 창출 의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눈앞에 보이는 이해타산에 따라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목적 추구로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는 며칠 뒤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최선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선택의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진실하고 정직하며 진정한 비전을 보여 주는 인물을 선택하는 지혜 짜내기가 그 최선의 길일 것이다. 그 길을 '여느냐, 못 여느냐'도 우리의 몫이다.

하늘을 따르는 마음 가져야

자연은 언제나 하늘을 따른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양식'의 지향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에 다름아니다. 그 자연은 이 봄에도 어김없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올려 우리를 풍요롭게 해 준다.

옛말에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하늘을 따르는 평상심(平常心)으로 돌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게 될까. 바쇼의 하이쿠가 끌어안고 있는 짧은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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