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패러디 공화국'

입력 2000-03-23 14:27:00

'패러디 천국'의 ㄱ 씨.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란 말을 달고 다닌다. 부하직원들의 유머 자리. "그래서?"라고 물으면 이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다 웃는데 혼자 못 웃는 것만큼 슬프고 썰렁한 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썰렁맨'으로 불린다. 오늘도 "도대체 왜 웃는 거야?"라며 투덜댄다.

요즘 유머는 '멀티 패러디형'. 과거 특정인을 대상으로 '해부'하던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잘 자, 내 꿈 꿔'의 '허준' 버전. "오늘밤엔 내 꿈을 꾸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을 시엔 침을 놓겠소". 드라마 '허준'을 못 본 사람은 이해 부득. "에.... 잘 주무시구요. 에.... 내 꿈은 꼭! 꾸셔야 됩니다"(김대중 대통령) 정도나 알까.

매일이다시피 새로운 버전들이 속출하고 있다. '내 꿈 꿔'도 연예인 버전, 앵커버전, 대통령 버전 등으로 끊임없이 '자가분열'하고 있다. '멀티형 인간'이 아니면 '왕따' 당하기 십상.

요즘 확산되고 있는 유머는 우리 사회의 '패러디 선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패러디는 영화 광고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 유행상품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복제되며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유머뿐 아니라 유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복제된다. 영화 '매트릭스'는 1년 가까이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고 있는 패러디 품목. 공중에 떠 360도 화면이 돌아가거나 총알을 피하는 장면은 지금도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최근에 출시된 박수동씨의 애니메이션 '고인돌'과 22일 방송된 TV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도 패러디됐다.

패러디 바람이 가장 거센 곳이 사이버 공간. 인터넷에서는 하루가 멀게 패러디 사이트가 생겨나고 있다. '패러디'라는 검색어로 수백가지 관련 사이트가 검색될 정도. 최근에는 총선바람이 불면서 '오마이뉴스'(www.ohmynews.co.kr) 데일리클릭(www.dailyclick.co.kr) 망치일보(www.hammer.co.kr) 뉴스보이(www.newsboy.co.kr) 등 인터넷 신문들도 관심을 끌고 있다.

가히 패러디의 천국이다.

패러디의 뿌리는 익명성이 보장되고 단시일 내에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터넷이란 미디어 영향이 크다. 복제에 따라 품질이 저하되던 아날로그와 달리 완전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의 특성도 한 몫. 컴퓨터에 즐겨 쓰는 '버전''업그레이드'와 궤를 같이하는 것도 디지털 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이 즉물적인 세태 반영이다. 흔들리는 가치, 권위주의의 해체, 파편화된 의식 등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풍자로 표출된다는 것.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수용할 능력 없이 기지와 재치로 단기적, 순간적으로 건너 넘는 단계.

생활에 찌든 심신을 일시 '해독'하는 작용은 있으나 패러디의 만연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 이진우 계명대 철학과교수는 "요즘 패러디는 메시지와 대안 없이 가벼운 말장난, 유희에 그치고 있다"며 "주변과 수단이 주(主)가 되는 사회는 건전하지 못한 것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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