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세기말 현대인의 우울한 하루

입력 2000-03-04 14:02:00

"지겨워서 미치겠어. 매일 사람 몸에 구멍 뚫고 들여다보는 것도 지쳤어"

영화 '구멍'을 정의하는 '나'(안성기)의 대사다. 알콜 증세로 수술 중 손이 떨려 메스를 떨어뜨리는 외과의사, 난잡한 섹스, 급기야 닥쳐온 이혼소송, 영혼의 굶주림을 성으로 달랬던 애인 선영(김민)의 이별 선언. 우주를 유영하듯 가닥을 잡지 못하고 떠도는 가련한 영혼. 그 영혼이 바로 '나'다.

'구멍'은 세기말의 우울한 판타지를 그린 영화다. 우주를 유영하듯 심리적 블랙홀에서 허덕이는 한 인간의 기이한 일상이 21세기를 며칠 앞둔 1999년 12월 15일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외과 의사인 '나'는 숙취로 진저리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어젯밤 몇 명의 남녀와 낯선 별장에서 술을 마셨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번인데도 병원에서 호출이 온다. 수술을 해야 하고, 오후에는 이혼소송으로 법원에 가야 한다. 또 저녁에는 등화관제 훈련이 있다.

차안에서 소포로 받은 카세트 테이프를 건다. 선영의 목소리. 맹장수술 환자와 의사로 만난 둘은 깊은 성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제 선영은 자신을 쾌락의 상대로만 여기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떠나려고 한다.

'구멍'은 현대인들의 고독과 불안, 공포와 허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방은진이 유혹에 쉽게 빠지는 허영기 많은 여인으로, 사현진이 술과 마약에 찌든 자유분방한 아가씨로 출연한다. '허수아비'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구멍'으로 개명한 최인호의 소설이 원작.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상영돼 호평받았으며 올해 인도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김국형 감독은 서울예대 영화과를 나와 오랫동안 배창호 감독 영화의 조감독을 했던 정통 충무로 출신. 18세 관람가.

(4일 대구극장 개봉) 金重基 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