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신용덕의 '백남준의 세계'전 관람기

입력 2000-03-02 14:19:00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68)이 지난 달 11일부터 오는 4월26일까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백남준의 세계(The Worlds Of Nam Jun Paik)'전을 지난 10일(현지시간, 프리뷰).11일(일반전시) 이틀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1982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진 백남준은 두 곳의 중심미술관에서 회고전 초대를 받은 흔치 않은 작가가 되었다. 맨해턴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은 스페인의 빌바오,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독일의 베를린 등에 분관을 두고 있으며 통틀어 연간 3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불러들이는, 소위 세계미술의 중심이라는 자신감을 가진 미술관이다.

이번 '백남준의 세계'전은 뉴 밀레니엄을 맞아 구겐하임 미술관이 준비한 첫 전시이다. 구겐하임측은 지난 95년 회고전을 제의했다. 그후 백남준은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상황과 당뇨병으로 고생하며 백내장 수술을 두 번 받았을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어느 정도 회복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2년여 동안 준비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특별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번 전시가 '포스트 비디오아트(Post Video Art)'로 명명되기를 바랐다. 이는 '비디오아트 이후'라는 뜻으로 자신을 현대미술사에서 확고부동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한,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이후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강하게 시사하려는 의지이다. 그 새로움의 중심이 레이저를 활용하는 것이며 이는 백남준에게나 그의 관객 모두에게 큰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이미 미술사적으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위치를 획득한 작가이다. 그런 그가 극심한 신체적 상황을 무릅쓰고 새로운 모험의 세계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며 이런 도전정신에 대해 현지의 전문인들은 경이로워하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특이한 외관과 내부구조로서 상자형 건축이 밀집한 맨해턴의 풍경에서 독특하다. 건물 중앙에 직경 약 30m의 원형 로비, 공간을 두고 그 주위를 나선형으로 램프(ramp: 언덕처럼 오르는 통로) 및 통로가 약 6층 높이로 이어져 있다. 이 공간이 이 미술관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공간이며 그 중간에 장방형의 크지 않은 전시공간들이 연결돼 있다. 어느 높이에서나 안쪽의 로비공간을 내려볼 수 있으며 맨위 천장은 천창(天窓)으로 돼있다. 경사진 통로를 오르며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진 벽면에 걸린 작품을 보는 것은 일반적인 수직·수평으로 이루어진 전시공간과는 매우 다른 경험을 갖게 한다. 이 건축물은 1959년 당시 건축계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최대의 소장품이 건축 자체"라는 평가도 있지만 백남준은 그 건축적 특성을 최대한 이용한 설치작품들로 또다른 평가를 얻고 있다.

로비 공간에는 100대의 TV가 하늘을 보게 설치돼 있다. 화면에는 그의 출세작인 '글로벌 글루브'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의 빠른 이미지들이 뒤섞인다. 천창(天窓)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바닥에서 위로 쏘여진 레이저가 신비로운 색채와 함께 쉼 없이 태극의 변화같은 도형을 그리고 있다. (작품 '동시적 변조-달콤하고 장엄하다〈Moduration in sync-Sweet and sublime〉')

7층, 25m 높이에서 바닥으로-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디자인한 이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분수대 속으로-물줄기들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그 물줄기 사이로 레이저의 신비로운 빛이 지그재그로 거슬러 오르듯 비추고 있다. (작품 '야콥의 사다리〈Jacob's Ladder〉')

이 새로운 신작들은 약간 어둡게 조절된 공간 속에서 변화있는 빛과 소리의 혼란을 경험하게 하며 부분이 아니라 총체적인 공간의 분위기에 빠져들도록 한다. 백남준이"나는 이제 장엄미를 추구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레이저의 신비로운 색채들은 초월자에 대한 신앙심의 표현"이라고 밝힌 말의 의미를 실감케 한다.

나선형의 램프에는 70년대 그의 대표작들이 설치돼 있다. 300대의 TV가 동원된 'TV가든' 'TV부처' 'TV로댕' 'TV첼로' 'TV시계' 'TV촛불' 등과 93년도의 '몽골리안 텐트' '패밀리 시리즈'등의 작품들이 걷는 동선을 고려해 연결, 설치돼 있다. 특별실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 3점의 레이저 작업이 설치돼 있다. 비디오의 설명적인 형상성과 이미지들은 TV모니터의 한계를 벗어나 레이저의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추상의 숭고한 분위기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뉴욕 타임스 등 세계의 언론은 백남준을 새로운 영역으로 쉼 없이 달려가는 '전자마법사(Electronic Wizard)'라 평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아트뉴스 1월호 보도에 따르면 백남준은 80세가 되는 오는 2012년 카네기홀을 빌려 60년대의 세계예술과 그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탄생 100주기를 기리는 신작을 발표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장난기 가득한 비디오아트의 시기를 지나 숭고하고 장엄한 레이저아트, 그리고 다시 원래 그가 음악을 공부하려 했던 청년이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듯 카네기홀로.... 끝없어 보이는 그 미지의 여정은 다름아닌 한 위대한 예술가의 열망이다. 다만 2012년까지 그가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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