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빛낼 인물-이창동 영화감독

입력 2000-02-18 14:18:00

이창동 감독(46)의 영화계 출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가 지난 97년 '초록물고기'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이창동'은 돌출적인 이름이었다. 그를 따라다닌 '소설가 출신''화려하게 변신한'이란 수식어는 '바람(영화에) 피운 소설가''일회성 영화감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포트 라이트는 막둥이 역의 한석규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3년 후. 그의 이름은 '제값'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영화의 미래'라는 극찬과 함께 한국영화에 드문 작가주의 감독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2탄 '박하사탕'이 공개되면서 인 '이창동 바람'은 1탄 '초록물고기'가 우연한 '홈런'이 아님을 확인하는 이창동 재확인의 계기가 됐다.

그의 두 작품은 영화가 사회의 투영물임을 일깨운 의미 있는 결과물이었다. '박하사탕'을 보고 어떤 이는 '오발탄' 이후 최고의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했고, 한 소설가는 영화로 전업한 그의 '배반'을 아깝지만 열악한 한국영화 현실에서 보면 다행스런 일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런 찬사의 중심에 선 이 감독은 오히려 차분한 모습이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지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다가도 제 페이스 찾기를 거듭한다. 찬사가 "과장된 것"이며 영화는 "피곤한 작업"이고, "좋은 연기자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제 완전히 영화감독이 됐구나 싶었던 것이 "관객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말이다. 진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관객에 영합하지 않고 여운이 남아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으며, "고민의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 붓고 있다"고 했다.

대구에서 학교(경북대)를 마치고, 등단(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소설 '전리'로 등단)한 그가 서울로 '튄' 것은 오래됐다. 박광수 감독 등 중견 영화인들과 충무로를 주유하면서 영화인들 사이에 '이창동'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지 10년이 넘었다.

94년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조연출로 현장감을 체득했고, 소설가의 '끼'를 쏟아 시나리오도 적지 않게 발표했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유난히 정교한 것은 그의 소설가적인 기질이 반영된 것이다. 구성의 탄탄함에 작가로서 가진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더해지면서 이 감독의 작품은 60년대 '마부''쌀' 등 리얼리즘 영화의 계보를 잇게 됐다.

현대사회의 가족 해체와 불확실성을 신도시를 배경으로 풀어낸 '초록 물고기'와 20년의 시간 여행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아스라한 첫사랑에 대입해 그린 '박하사탕'은 그가 아니면 한국영화에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세기말이다, 새 천년이다, 다들 떠들썩했던 1999년에 뜬금 없이 과거 여행기 '박하사탕'을 내놓은 것도 작가적인 의무감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과거를 잊기 위해 과다하게 미래만 얘기하는, 균형감 잃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작가의 돌팔매질과도 같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영화도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대부분의 영화가 재미있지만 극장 문을 나서면 잊어버린다. 2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삶을 되돌아보는 영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 감독의 '출현'은 영화가 10대, 20대의 전유물만은 아님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감수성만 쫓는 그들을 진득한 우리의 정서로 이끈 계기가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것은 한국 영화에서 한국이 없는, 어떻게 보면 기막힌 우리의 영화 현실에서 '영화는 사회의 투영물'이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영화의 존재 가치를 부여해 준 점이다.

한국 영화가 이 감독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박하사탕' 두 번 보기 운동에서도 보듯, 관객들의 바람도 커졌다. 새 천년을 빛낼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 돼 가는 그는 대구 출신이기에 앞서 한국영화에 작가다운 작가, 감독다운 감독의 탄생을 지켜보게 해 더욱 즐겁게 만든다.

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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