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최창국 논설위원)

입력 2000-02-08 14:23:00

본시 '여자란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고 했다. 요컨대 세상일을 도무지 모르고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고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새 천년을 맞고 음력 설까지 쇠고 난 직후부터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여간 심상치 않은 게 아니다. 북유럽의 핀란드에선 설 쇤 다음날의 느긋한 기분으로 있던 뭇 남성들의 후두부를 강타할만한 또 한번의 '변고'가 생긴 것. 현직 여성 외무부장관이 총리 출신의 남성 후보를 누르고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로써 전세계에는 현재 여성 국가원수 또는 행정부의 수반만도 모두 11명을 기록하게 됐다. 11명이 제 고을의 장날을 모르기는 커녕 국가의 대사를 설거지하고 난 양손으로 틀어쥐고 지구의 이쪽 저쪽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여권 신장 어쩌구…하는 것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최소한 여풍(女風) 정도로는 표현해야 직성이 풀릴 듯. 특히 서남아의 스리랑카는 현재 모녀가 대통령과 총리를 동시에 틀어쥐고 있어 빈사지경의 그쪽 남권(男權)을 생각하면 미상불 예삿일이 아니다. 그것도 딸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는 대통령이고 어머니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총리가 돼 동양식의 장유(長幼) 개념도 없다. 이러니 모녀 갈등이 곧 권력 갈등이요, 권력 갈등이 곧 모녀 갈등이 아니되란 법이 없다. 이밖에 미국에선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가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모범을 보이고 있고 일본에서도 오사카부(大阪府)의 지사 자리를 여성이 차고 앉았다. 할로넨 새 핀란드 대통령은 여성인 점 말고도 특이한 이력이 있다. 69년 핀란드학생협회 사무총장직 이후 정계에 입문한 것까진 납득이 가지만 80년대엔 남녀 동성연애자협회 회장직을 맡기도 한 것. 평소 동성연애자 권리를 적극 옹호했으며 그러면서도 딸 하나를 두고 결혼은 하지 않은 채 '남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다니 정숙과 현모양처를 여성 제1의 가치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을 생각하면 납득 안되는 이력이다. 4월 총선을 비롯, 한국 여성들의 활약상도 이젠 괄목상대 수준이다. 외조해야 하는 남편들의 바람은 실로 담백하다. 가사도 돌보고 국사를 챙기라는 것. 입맛이 썩 개운하진 않지만 '여자란 모름지기 이래야…'를 강변할 세상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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