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곳 없는 노숙자, 방황하는 실업자, 굶주리는 아이들...
한쪽에서는 흥청거리며 소비향락을 쫓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 소위 '20대 80'의 불평등 사회구조, 빈부의 양극화는 IMF 2년을 막 넘기고 2000년대를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본사 기획취재팀은 사회안전망에서 비껴나 있는 소외받고 가난한 이웃들의 실상을 집중 조명한다.
은정(7.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이는 오늘도 점심을 굶었다. 오전 10시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와 동네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식사 시간을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은정이에게 배고픔은 이미 익숙한 일이 됐다. 3년전 엄마가 가출한 뒤로 아침이나 점심을 제대로 먹은 적이 없는 탓이다.
"어쩌다 아빠가 주는 돈으로 빵을 사먹거나 생각나면 유아원에 가서 밥을 먹어요"공공근로사업에 나가는 것이 고작인 아빠는 술에 취한 날이 많아 은정이의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무료로 유아원에 다닐수 있게 됐지만 그나마도 거의 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2학년인 오빠가 올때까지 동네 놀이터에 가거나 쓰레기장을 뒤지는 것이 은정이의 일과. 오빠와 함께 먹는 저녁 한끼가 유일한 식사다. 겨울이 됐지만 옷도 복지관 언니나 이웃 아주머니가 헌옷을 구해줘 겨우 갈아 입고 있다.
은정이 뿐만 아니다. 달서구 지역의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나 저소득층이 몰려 있는 서구 비산동 등지에선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다.
IMF 2년. 나라 경제는 호황기에 접어들었다지만 '절대 빈곤에 직면한 이웃'은 곳곳에 널려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취학 결식아동.2천300세대의 영세민이 몰려 있는 임대 아파트 단지인 달서구 월성동 주공아파트. 1만명이 조금 넘는 전체 주민중 500여명이 학교 다닐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중 상당수가 '결식'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올 겨울 이들에 대한 급식 프로그램은 전혀 없다. 방학 기간 동안 취학 아동에게 주어지는 급식비도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지난 겨울 결식 아동을 위한 식당을 운영했던 상인복지관 이기연(30)과장은 "40여명을 대상으로 외부 지원을 받아 점식을 제공했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 동생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아 놀랐다"며 "올 겨울도 이런 아이들의 겨울나기가 걱정"이라고 밝혔다.
학교 급식이 확대되고 시내 곳곳에 무료 급식소가 등장했지만 미취학 아동에겐 '그림의 떡'인 셈이다.
가정복지회 정재호 국장은 "노숙자나 노인들은 최소한의 의사 표시라도 가능하지만 아이들은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복지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며 "신체나 정서적으로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시기인데도 정부나 복지단체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급식비 지원은 받지만 취학 아동의 '겨울 나기'도 만만치 않다.
500명이 조금 넘는 전교생중 200여명이 '공식' 결식아동인 월성동 학산초교.
다른 학교와 달리 음식물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것이 자랑이 된 이 학교는 학교 급식이 시작된 이후 결석이 거의 사라졌다. 따뜻한 점심 한끼가 아이들에게 학교 오는 재미를 더한 때문. 몸이 아픈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어 밥을 거르기 일쑤인 철우(2학년)는 "날마다 다른 반찬이 나오는 점심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고 했다
도정숙(62.여) 교장은 "우리 학교 애들로 봐서는 차라리 방학이 없는 편이 낫다"며 "방학 동안 교육청에서 결식 아이들에게 하루 2천원씩의 쌀과 부식을 제공한다고 하지만 걱정"이라고 밝혔다. 결식 아동의 대다수가 결손 가정인 탓에 제대로 식사를 챙겨 줄 사람이 없는 탓이다. 20세기의 마지막 겨울. 빈곤에 내몰린 결식 아이의 얼어 붙은 동심은 희망에 찬 새 천년에도 아랑곳 없이 그대로 이어질 것 같다.
李宰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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