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에게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은 창작의 소재로 다가온다.
거장의 사랑, 가족사를 파악하는 일이 의미를 가지는 것도 그만큼 작가의 개인적 체험, 그중에서도 인간관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경우는 특이하다.
그는 두가지 예술작품에서 얻은 감흥을 바탕으로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됐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짚더미'와 바그너의 음악 '로엔그린'이 바로 그 촉매제.
모네는 같은 사물이 빛의 양, 날씨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반복해 그렸다. 사물의 형태가 희미하게 나타나는 '짚더미' 연작도 그 중 하나.
칸딘스키는 1885년 이 작품을 보고 충격과 함께 '대상의 모습을 뚜렷이 그리지 않고도 이토록 선명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데 왜 화가들은 형태와 색채만을 고집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을까'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런 의문은 같은 해 접하게 된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을 통해 풀렸다.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동안 그는 선율에서 원초적인 선들을, 제각각의 음색을 지닌 악기 소리에서 현란한 색채를 연상했고 1910년, 그 때의 감흥을 캔버스에 옮긴 '추상 수채화'를 발표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러나 작가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 이 작품은 세계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 수채화로 평가된다.
물론 추상미술을 칸딘스키라는 천재 작가의 '발명품'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모네를 비롯 생 빅트와르산을 커다란 색면으로 묘사한 세잔느, 고갱, 고흐 등이 추상미술의 출현을 암시하는 작품을 선보였고 1910년을 전후해 피카소 등 다른 화가들도 비슷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칸딘스키가 유독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되는 이유는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인 칸딘스키는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 법률학 교수로 초빙될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화가였다.
동물적 색감과 조형의식을 무기삼아 거의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기존 거장과 달리 학자적 성향이 강했던 칸딘스키는 미술이론 연구서를 출판하는 등 추상미술의 이론적 체계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동시대인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혁명적 시도를 감행한 대부분의 거장들이 그러했듯 칸딘스키 역시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추상작품을 선보인후 가혹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칸딘스키가 회장으로 있던 신예술가연합 회원전에 대한 보도는 당시 칸딘스키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당시 신문들은 '이 모임의 회원들은 치유될 수 없는 정신착란에 걸렸거나, 센세이셔널한 사건에 목말라 하는 현시류를 날쌔게 파악해서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경솔한 허풍선이, 둘 중 하나이다'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추상 수채화'를 발표한 1910년을 기점으로 추상미술은 현대 회화의 거대한 흐름이 됐고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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