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휘파람 소리에 대한 향수

입력 1999-09-14 00:00:00

정치 혹은 사회적인 제약, 혹은 인습적인 구속력 때문에 자기표현이 금기시 되거나 절제되었던 시대를 살았던 기성인들은 젊은 시절에 곧잘 구사하였던 아련한 휘파람 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주고 받는 당사자들 밖에는, 언어소통으로 간주될 낌새가 없었으므로 익명성이 철저하게 보장되었던 이 휘파람 소리는 70년대 중반까지 통제와 인습에 짓눌려 살았던 젊은이들 끼리 나누는 의사소통의 방법으로는 가위 독보적인 통신수단으로 회자되어 왔었다.

바깥 출입을 삼엄하게 통제받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멀리서 들려오는 암호식 휘파람 소리 한가지로 발신자의 정체는 물론이었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하여 만나자는 약속까지 할 수 있었다. 특히 어른들 몰래 열애 중인 젊은 남녀들에겐 지금에 와선 한낱 퇴행성 통신수단 기능일 수밖에 없는 휘파람 소리의 터득은 비켜날 수 없는 필수과목 중의 한가지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군사작전에서 암호나 군호로서도 정보원들이나 범죄수사관들끼리 나누는 의사소통에도, 혹은 건달들과 깡패사회에서도, 짐승과 물고기들을 부르고 내쫓는 방법으로서도 이 휘파람 소리는 그 소용가치가 광범위 했으면서도 정확하게 통용되어 왔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에서 혹독한 노역에 지친 영국군 포로들이 휘파람 소리로 군가를 합창하며 위로받고 일본군의 비인간적인 횡포를 암묵적인 방법으로 조롱했었던 장면도 우리는 기억한다. 그처럼 우리 역시 나름대로 독특한 휘파람 소리를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청소년시기를 거쳐 어른이 되었다. 그러한 노력들과 유행은, 통제되고 억압된 사회를 살아가는 서민들이 최소한 사생활의 비밀을 지켜나가려는 바늘구멍 속의 몸부림이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퇴행성 통신수단은 기억 속에만 아련할 뿐, 어느 누구도 군침을 삼키지 않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요사이도 어디선가 낯선 휘파람 소리가 들려 온다면, 그것은 필경 개고기를 좋아하는 동호인들 끼리 나누는 의사소통 쯤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 두사람 중에 한사람 꼴로 언제 어디서든 상대방과 통화 가능한 휴대폰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삐삐와 같은 통신기기는 걸기적 거려서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챈 정부기관이 개인의 사생활적인 통화정보를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마구잡이로 침해하고 도둑질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도청행각은 출범할 때 부터 지금까지 인권보호의 의지를 기회있을 때 마다 천명하였던 국민의 정부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름하여 휴대폰일 따름이지 모든 개인용 통화기기는 그 소용면에서나 기능면에서나 바로 우리 집 안방에 놓여 있는 전화기와 다름아니다.

자기 집 안방에 놓여 있는 전화도 마음대로 걸 수 없는 살벌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삼엄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범죄수사를 빌미로 통화조회가 불가피하다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조회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집안으로 뛰어든 오소리 잡듯 마구잡이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지 않은가. 어디 전화 뿐인가. E메일 정보까지 마구잡이로 뒤지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조차 어리둥절해진다.

숨을 쉬고 살려면, 그리고 주눅들어 살지 않으려면, 다소 체통의 손상을 각오하고서라도 지난 날에 불었던 휘파람 소리를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휴대폰이란 첨단 통신기기가 사생활의 영역을 파괴할지도 모를 위험천만의 도구로 변질될 우려가 다분하다면, 이미 잊어버렸던 휘파람 소리를 배워서라도 최소한 사생활이나마 방어해야 한다는 말이 한낱 우스갯 소리로만 들릴 수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는 중요한 일은 불편하더라도 전화로 걸지 말라는 충고가 들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한가지 뿐이다. 모두들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 소리를 내어보자 김주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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