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을 떠나 보내며

입력 1999-09-04 00:00:00

계절이 새로 옷을 갈아 입었다. 아침 저녁으로 피부에 와닿는 바람결이 며칠새 전혀 다르다.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성큼 와 있다. 한가위가 멀지 않고, 곧 거리의 낙엽이 발끝에 채일 것이다. 가을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즐거움은 자연 그 자체다. 가족이 함께 야외에서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계절의 혜택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주말과 휴일, 도시의 가족들이 찾아갈 곳이라곤 '피자 헛'이나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고작이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자연과 전시회, 음악회 등 문화예술 현장은 우리 아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부모와 아이가 나란히 문화현장을 찾아가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소년들이 바른 정서와 문화의식을 높여갈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 공부에 찌들린 아이들, 대자연의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지도 못한 채 복잡한 도시에서 저대로 자라고 있다.

◈청도 '시한문학자료관' 폐관

이런 형편에서 우리의 가슴을 우울하게 하는 소식이 들린다. 3년 전 청도 각북면에 문을 연 '시한문학자료관'이 폐관된다는 소식이다. 향토 유일의 문학자료관으로 그간 어렵게 운영돼온 터라 문을 닫기까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우리 고장의 문화자산이 이 계절에 또 하나 사라지고 있다. 문학자료관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러브호텔과 대형식당들. 불과 몇해 전의 고즈넉하던 분위기를 이제는 찾을 길이 없다.

이 문학자료관은 국내 여러 문학관의 전범(典範)이 될만큼 선구적 역할을 한 의미깊은 문학관이다. 김성종 추리문학관, 박화성 문학관, 동서문학관 등 국내 주요 문학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방대하고 꼼꼼한 자료들이 눈길을 끌었다. 개인이 사비를 털어 모아온 자료들. 이 소중한 문학자료를 봐줄 사람들이 없고, 애착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더 큰 아쉬움이다.

◈서울 근교로 옮겨가

"여건이 낫고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서울 근교로 옮겨갈 계획"이라는 게 자료관측의 말. 대구 인구가 얼만데 지역에서 유일한 문학자료관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일본의 경우 동네마다 크고 작은 문학관을 건립, 이를 자랑거리로 여긴다는데….

더욱이 옮겨가기에 앞서 향토와 관련된 문학자료들을 어디 기증하려 해도 관심을 보이는 기관단체도 없다. 근대 이후 현진건 이상화 이육사 백기만 김동리 조지훈 박목월 등 수많은 문인들이 이 고장에서 배출됐지만 어디 번듯한 문학관 하나 있었던가. 개인.기관 할 것없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자랑스런 선배들의 발자취를 보여줄 문학관에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서글픈 현실이다.

대구 출신 실록작가인 정영진 관장은 "대구와 서울의 문화의식이 생각보다 차이가 많다"고 말했다. 자료관 운영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필요한 곳, 있을 곳에 있어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착잡한 심경을 고백했다.

과연 우리는 대구를 찾는 외지인에게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지난 겨울 서울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하던 말이 떠오른다. "벌써 그 곳에서 마음이 떠났다"는 그의 말은 이 가을에 고향사람들에게 보내는 유감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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