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지도(보현사 주지)

입력 1999-07-26 14:06:00

여름의 한적한 멋은 비온 뒤 산내음을 따를만한 것이 없다. 불현듯 산내음이 그리워 청도 적천사를 찾아가니, 조사전(祖師殿) 뜰 앞에 수련(睡蓮)이 피어 해맑게 웃음짓고 있었다.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기다림에 지쳐 잠시 눈을 돌릴 때 꽃은 어느새 몰래 피어 마치 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듯 하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사이지만, 그래도 피어 있는 꽃은 은밀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수련은 따뜻하고 지저분한 물속의 진흙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 검은 진흙덩이와 지저분한 물만 보았다면, 그 속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청초한 꽃이 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수련이 피기 전의 진흙과 더러운 물은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지만, 수련은 오히려 물의 더러움을 정화하면서 모두가 감탄하는 깨끗한 꽃을 아침 햇살 아래 피어낸다. 물속에서 피어난 꽃송이에는 한방울 물도 묻어있지 않다.

진흙을 딛고 서 있는 수련의 모습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잃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이 묻어있다. 바로 시간과 함께 하는 변화, 노력과 함께 하는 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항상 변화하고, 그 변화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시간에 따른 변화를 간과하여 삶을 올바르게 판단할 기회를 놓친다. 내가 알던 사람이 성공하면, "저 사람은 예전엔 별 것 아니었어"라고 흠집을 들춰내고, 과거에 당한 상처를 지우지 못해 오랫동안 자신과 상대를 괴롭힌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주위를 돌아볼 사이 없이 허겁지겁 살면서, 세상에 대해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더러 세상을 모른다며 철없다고 취급한다.

변화를 믿을 수 없다면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불교에서 인생은 숙명이 아니라 인과(因果)라 표현한다. 비록 과거는 초라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으며, 미래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의 노력으로 성장한 결과가 바로 내일이다. 그러기에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과거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 여기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간다.

진흙 속에서 피는 청아한 수련에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은 수련의 변화와 성장을 인정한다. 아마 그 사람은 한 떨기 수련을 닮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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