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첫 전시회로 2000년 1월부터 '포스트 비디오-백남준회고전' 기획.
올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화계 빅뉴스이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 백남준(76)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준 소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전시회나 각종 수상 소식에 읽을 수 있는 백남준의 활동은 그의 예술적 업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80년대부터.
1960~70년대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위적 활동을 벌여왔던 그가 어느정도 '잘 나가는' 작가가 된 후에야 고국에 소개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동경(東京)대' '음악' '플럭서스'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 등이 그의 과거를 이해하는 키워드.
◇동경대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당시 국내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 소유주 백낙승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국민 대부분이 먹고 살기에도 바빴던 그 시절. 집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예술적 재능을 키웠다. 본격적인 예술계로의 진입은 일본 동경대 입학과 함께 이뤄졌다. 사업가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34년만인 1984년에야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음악
백남준을 '미술작가'로만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오히려 그는 음악가로서 예술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중) 재학시절 '향수'란 곡을 작곡했고 그의 최초의 퍼포먼스도 음악회 형식이었다. 비록 피아노를 깨부수는 색다른(?) 음악회였지만. 후일 관심은 미술분야로 확대됐고 이런 배경들이 그에게 작곡가·조각가·비디오 예술가.비디오 철학자·설치미술가·화가·행위예술가 등의 대명사를 부여한 계기가 됐다. 장르 구분이 그에겐 무의미한 줄긋기인 셈이다. ◇플럭서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매키어너스와의 만남은 백남준의 예술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흐름' '끊임없는 변화'를 뜻하는 '플럭서스(본보 5월22일자 12면 참조)'는 예술과 관련된 모든 고정관념을 파괴하려는 예술인들의 모임. 백남준은 60~70년대 플럭서스를 중심으로 전위적인 활동을 펼쳐 국제사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존 케이지·요셉 보이스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 멤버였던 요셉 보이스는 전위 음악적 영감과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어넣어준 스승이자 동지였다. 이들과의 친분이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스스로 회고할 정도. 이들은 백남준의 작품 활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을 주제로 첫 퍼포먼스를 열었고 보이스와는 함께 공연(도끼로 피아노를 부수는 등의)하기도 했다.
1962년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비디오 아트의 기원을 열었을 당시부터 백남준의 관심은 TV에 쏠려있었다.
후기 산업사회의 최대 오락물이자 기술문명의 상징인 TV. 백남준은 이를 관람자들의 교감을 위한 소통 도구로, 나아가 인류를 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매체로 변모시켰다. 가장 서구적인 그릇에 지극히 동양적인 사상으로 담아낸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1984년초 전세계에 방영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으로 이어졌다.
조지오웰은 '빅 브라더'가 TV를 통해 세계를 지배, 1984년무렵 세상은 비인간적 삶의 공간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내용의 소설 '1984년'을 쓴 작가. 백남준은 TV가 가장 인간적인 내용을 담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오웰의 예언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했다.
TV속에서 동·서양을 융합시킨 '바이바이 키플링'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동·서양의 정신세계는 상극관계이므로 결국 함께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의 생각을 서구 매체와 동양 사상의 화합을 통해 반박했다. 6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날부터 오늘까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인 백남준. 지난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이후 계속되는 작품 활동은 육체적 제약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늘 그러했듯 그는 눈감는 그날까지 국경과 인종, 장르를 초월하는 영원한 자유인이자 문화테러리스트일 것이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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